종묘 [宗廟]

 

조선 왕조를 연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재위 1392∼1398)는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오른 뒤부터 종묘 건설과 도읍지를 정하는 일에 무엇보다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종묘는 왕조의 뿌리를 상징하는 시설이고, 도읍지는 국가 통치의 기반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태조는 즉위 12일만인 7월 28일 자신의 4대조에게 차례로 목왕(穆王), 익왕(翼王), 도왕(度王), 환왕(桓王)으로 왕의 칭호를 올리고, 그 비에게도 각각 효비(孝妃), 정비(貞妃), 경비(敬妃), 의비(懿妃)의 존호(尊號)를 올렸다.

 

창덕궁 [昌德宮]

 

창덕궁(昌德宮)은 조선 왕조의 도성인 한양 북쪽에 위치한 이궁이었다. 응봉에서 뻗어나온 산줄기 자락에 자리잡았는데, 궁의 동쪽으로는 창경궁이, 동남쪽으로는 종묘가, 서쪽으로는 정궁인 경복궁이 위치해 있다. 1392년 건국된 조선 왕조는, 새로 지은 경복궁에서 왕자들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다시 천도한다. 이때 태종은 무악 아래 새 도성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한양으로 재천도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태종은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교동에 궁궐을 하나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고 이름지었다

 

해인사 장경판전 [海印寺 藏經板殿]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사찰이다. 통도사·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고려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法寶)사찰이라고도 부른다. 장경판고라고도 하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 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록에 따르면 1481년(성종 12)에 고쳐짓기 시작하여 1488년(성종 19)에 완공했다고 한다. 깊은 산 속에 있어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1622년(광해군 14)과 1624년(인조 2년)에 수리했다.

           
 

   
 

조선왕릉 [朝鮮王陵]

 

우리나라의 조선왕릉(朝鮮王陵)은 519년 동안 지속된 한 왕조의 왕과 왕비의 무덤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유적지다. 조선 왕조의 무덤은 총 119기인데 그중 임금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왕릉은 42기다. 42기의 왕릉 중 40기가 2009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옛 고려의 도읍지인 개성에 있는 2기는 북쪽에 있어 함께 등록되지는 못했다. 조선 왕릉은 자연을 중시하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아 자연 친화적인 아름다움이 뛰어났다. 봉분을 세우는 방식, 주변 석물들의 배치에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경주 불국사 [慶州 佛國寺]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 서쪽 중턱에 있는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이차돈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과 기윤부인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진흥왕 35)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한, “670년(문무왕 10)에는 이 절의 강당인 무설전을 짓고 신림·표훈 등 의상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였다”고 전한다.

 

경주 석굴암 [慶州石窟庵]

 

통일신라시대에 경주 토함산(吐含山)에 세워진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이다. 신라인들의 신앙과 염원, 뛰어난 건축미, 성숙한 조각기법 등을 보여주는 역사 유적으로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刱)할 때, 왕명에 따라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경주 역사유적지구 [慶州歷史遺蹟地區]

 

경주는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56명의 왕이 다스리며 천 년 동안 왕조를 이루어온 ‘신라’의 수도이자, 신라시대 역사와 문화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아주 특별한 도시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문화재와 박물관일 만큼 숱한 명소들이 도시 전체에 퍼져 있다. 개국 이래 천 년 동안 도읍을 옮긴 적이 한 번도 없다 보니 천 년 왕국 신라의 역사가 고스란히 한 곳에 집중된 것이다. 도시화되어 도로가 넓어지고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긴 했지만, 21세기 경주는 여전히 천 년 전 신라의 유적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경주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高敞和順江華-遺蹟]

 

고인돌은 기원전 2000년~1000년, 세계 곳곳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문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거석문화의 발현이다. 고창, 화순, 강화의 선사시대 무덤은 기원전 1000년경의 돌무덤 몇 백 기를 보여 주고 있다. 고인돌은 티베트, 쓰촨(四川), 간쑤와 같은 중국 서부와 산둥 반도, 일본 규슈 북서 지방과 같은 해안 지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인돌은 한국의 청동기시대에 전래되었다. 고창의 죽림리 고인돌 군은 기원전 7세기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의 고인돌 건설은 기원전 3세기에 중단되었다.

 

수원 화성 [水原 華城]

 

조선의 성은 임진왜란(1592)을 맞아 무참히 허물어져버렸다. 이에 성곽의 방어 체제와 능력에 대한 고민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 때 재상을 지냈던 서애 유성룡(柳成龍)은 전쟁이 끝나자 『징비록』을 작성하여 "성곽에는 반드시 옹성과 치성이 갖춰져야 함"을 거듭 역설했다. 이 말은 훗날 수원화성을 쌓는 데 크게 반영되었다. 본래 수원의 행정청[邑治]은 지금의 수원에서 남쪽으로 약 8㎞ 떨어진 화성군 태안면 송산리의 화산 아래 있었다. 정조는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읍과 민가들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안동 하회마을 [安東河回─]

 

민속적 전통과 건축물을 잘 보존한 풍산유씨(柳氏)의 씨족마을이다. 하회마을의 지형을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낙동강 줄기가 이 마을을 싸고돌면서 ‘S’자형을 이룬 형국을 말한다. 강 건너 남쪽에는 영양군 일월산의 지맥인 남산이 있고, 마을 뒤편에는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花山)이 마을 중심부까지 완만하게 뻗어 충효당의 뒤뜰에서 멈춘다. 강 북쪽으로는 부용대가 병풍과 같이 둘러앉아, 산천 지형 또한 태극형 연화부수형국을 이룬다. 유성룡(柳成龍) 등 많은 고관들을 배출한 양반고을로, 임진왜란의 피해도 없어서 전래의 유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경주 양동마을 [慶州 良洞ㅡ]

 

경주 양동마을은 안강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포항 쪽으로 가는 도로에서 약 2킬로 정도 들어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은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양대 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이다. 지리적으로 형산강의 풍부와 물을 바탕으로 넓은 안강평야가 펼쳐져 있다. 풍수지리상 재물 복이 많은 지형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마을 초입부터 제법 큰 양반 가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이들 기와집들은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으며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남한산성 南漢山城]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하였다. 《남한지》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가 총융사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성가퀴는 1,700첩이고, 4문(門)과 8암문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다만 성의 둘레가 6,297보, 성가퀴는 1,897보라고 하는 등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제역사유적지구 [百濟歷史遺跡地區]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 전라북도 익산시에 분포하는 백제와 관련된 8곳의 역사 유적을 가리킨다. 공주·부여·익산은 삼국시대 백제의 왕도((王都)가 있던 곳으로, 이 지역의 고고학 유적과 건축물들은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의 고대 왕국들 간의 상호 교류를 통하여 이룩된 백제의 건축기술 발전과 불교 확산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다. 또한 수도의 입지 선정, 불교 사찰과 고분, 석탑의 배치 등을 통하여 백제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 예술미를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로서 2015년 한국의 12번째 세계유산(문화)으로 등재되었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濟州 火山-, 熔岩洞窟]

 

제주도 화산지형의 빼어난 자연경관, 지질학적 중요성, 독특하고 풍부한 생태계가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최초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핵심지역과 주변의 완충지역을 합치면 총면적이 188.4㎢로 제주도 전체 면적의 10.3%에 달한다. 세분하면 한라산 천연보호구역(164.40㎢), 거문오름 용암동굴계(22.36㎢), 성산일출봉 응회환(1.68㎢) 세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주도 중심부에 위치한 한라산의 해발 600∼1300미터 이상의 산악 지역과 일부 하천을 아우르는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은 196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山寺, 韓國의 山地 僧院·僧園]

 

산사는 한국의 산지형 불교 사찰의 유형을 대표하는 7개의 사찰로 구성된 연속 유산이다.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로 전국에 결쳐 분포하고 있다. 한국에는 7세기~9세기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대승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수용하면서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다.그러나 14세기 이후인 조선왕조(1392~1910) 기간 동안에는 불교에 대한 억압 정책으로 인해 도시 사찰의 대부분이 강제로 사라지게 되었다. 산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형과 무형의 문화적 전통을 지속하고 있는 살아있는 불교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