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대도호부[ 江陵大都護府 ]-강릉(江陵)

1389년(공양왕 원년), 강원 영동 지방의 행정적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강원 영동의 거진(巨鎭)의 의미로 강릉대도호부로 읍격을 정하였다. 조선 개국 후 군현제 개편 시에도 강릉 대도호부의 읍격을 유지하였다. 특히 여말 선초의 전환기에 공신의 반열에 올랐던 김광을(金光乙), 함전림(咸傳霖) 등의 출사와 고려 초에 왕씨 성을 사성받았던 세력이 김씨 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강릉 지방과 조선을 개창한 중앙 세력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도 강릉이 대도호부의 읍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원주 강원감영[ 原州 江原監營 ] -원주(原州)

강원감영은 조선시대인 1395년(태조 4)에 원주에 설치되었다. 감영은 조선시대에 각도의 관찰사(觀察使:監司)가 정무를 보던 청사로 원주·전주·평양의 감영을 제외하면 한곳에 계속 있지 않고 소재지의 변천과 도시화 등으로 그 본래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 강원감영지는 당시의 건물인 선화당(宣化堂), 포정루(布政樓), 청운당 등이 원래 위치에 남아 있고 중삼문지, 내삼문지, 담장지 등 관련유구가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강원감영 이전의 원주목 관아의 건물지 등이 하층에 그대로 잘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관아 건물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김제군 관아[ 金堤郡官衙 ] -김제(金堤)

조선시대 행정구역 중 군(郡)에 해당한 김제의 관아는 동헌, 객사 영역으로 구분되었고, 각종 문루 및 건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아 건물로는 동헌, 내아, 피금각이 전해진다. 관아의 주요 시설이었던 객사와 관원이 집무를 보던 여러 청사, 2층 문루(정문)와 내삼문 등은 모두 없어졌으며 옛 위치만 알 수 있다.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동헌은 수령이 공무를 보던 건물로 1667년(헌종 8)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공포 등 건축양식으로 보아 1881년(고종 18) 중수된 것으로 짐작되며, 동헌 바로 뒤쪽에 자리한 내아는 현재의 관사(官舍)와 같은 건물로 같은 시기에 건립된 건물이다

           
 

 

 

 

강화 유수부 이방청[ 江華 留守府 吏房廳 ]-강화(江華)

이방청은 강화 유수부 내 육방(六房:예·병·공·이·호·형방) 중의 하나로서 1654년(효종 5) 유수(留守) 정세규(鄭世規)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한 건물인데, 1783년(정조 7) 유수 김노진(金魯鎭)이 내부를 개수하여 계홀당(桂笏堂)이라는 당호(堂號)를 게시하였다. 건물구조는 한식 목조 ㄷ자형 단층기와집으로 팔작지붕에 민도리 홑처마집이다. 모두 12칸으로 온돌방이 8칸이고 우물마루로 된 청마루가 12칸이며 부엌이 1칸이다. 1915년부터 현재까지 등기소로 사용하고 있다. 수차에 걸친 개수로 옛날 관아의 원형은 찾아볼 수 없다.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나주목 관아[ 羅州牧 官衙 ]-나주(羅州)

조선시대 지방행정 및 교육기관의 입지조건과 건축적 양식이 담겨 있는 유적으로, 목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 객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거의 없어지고 향교와 내아, 정수루(正綏樓)가 남아 있다. 사신이나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객사 금성관은 그 규모가 웅장하고 격식을 잘 갖춘 관아 건물로, 조선시대에는 여기서 매달 두 번씩 망궐례를 올리기도 하였다. 현재는 정청만 남은 상태이며, 없어진 동·서익청을 복원중에 있다. 관아의 정문인 정수루는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관아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내아는 목사가 살던 관사로, 1892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보은동헌[ 報恩東軒 ] -보은(報恩)

조선시대에 감사 또는 수령이 공사를 처리하던 관아의 중심 건물로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인 순조 때 중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이다. 익공식 양식으로 장대석의 낮은 기단 위에 앞쪽과 왼쪽에는 네모로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뒤쪽과 오른쪽에는 자연석 주춧돌을 놓았으며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2익공 형식의 포는 쇠서가 날카롭게 굽어 있고 쇠서 위아래에는 꽃모양 장식이 있다. 건물 내부는 앞쪽 1칸은 마루, 뒤쪽의 오른쪽 4칸은 대청, 왼쪽 3칸은 온돌방을 두었으며, 대청마루의 동쪽 1칸과 뒤쪽을 약 90㎝ 높여 누마루로 꾸며졌다.

           
 

 

 
 

동래부 동헌[ 東萊府東軒 ]-부산(釜山)

동래부 동헌은 1636년(인조 14)에 동래부사 정양필(鄭良弼)이 창건하였다. 같은 해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이 건립되었으며, 1700년(숙종 26)에 독진대아문을 개수하였다. 1711년(숙종 37)에는 동래부사 이정신(李正臣)에 의해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을 걸고 아헌으로서 개항기까지 사용되었다. 1742년(영조 18)에 망미루(望美樓)가 독진대아문 앞쪽에 건립되었으며, 1870년(고종 7)에는 현재의 건물로 중건되었다. 동래부 동헌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좌우에 방이 있고 가운데에 대청을 두어, 대청에서 동래부사가 공무를 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현 관아[稷山縣官衙]-직산(稷山)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 군동리에 있다. 내동헌·외동헌·내삼문·외삼문의 4동의 목조건물로 구성된다. ‘湖西界首衙門’이라고 적힌 현판이 아문(외삼문)의 어칸에 달렸는데, 이는 관아가 경기도와 경계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내동헌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정면 4칸 중 오른쪽 3칸에 툇마루가 설치된 온돌방을 두었으며, 툇마루의 왼쪽 1칸에 부엌을 들였다. 직사각형의 평평한 돌로 기단을 낮게 쌓고 주춧돌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없다. 가구(架構)는 5량가로, 사다리꼴 모양의 대공(臺工)을 세워 종도리와 함께 지붕을 받쳤다.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서산관아문및외동헌 (瑞山官衙門및外東軒) -서산(瑞山)

조선시대 서산군의 관아로 객관, 동헌, 누정 등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관아문과 외동헌만이 남아있다. 조선 고종 4년(1867)에 당시 서산군수 오병선이 다시 지은 것이다. 관아문은 서산군 관아의 정문으로, 현재 서산시청 입구에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규모의 2층 문루 건물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1층은 돌기둥 모양의 주춧돌 위에 네모기둥을 올렸으며, 기둥 사이에 각각 대문을 달아 출입하게 하였다. 2층은 누마루를 깔고 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앞면에는 ‘서령군문(瑞寧郡門)’이라는 현판을 붙였는데, 서령은 서산의 옛 지명이다.

           
 

 

 

 

동경관[ 東京館 ]-경주( 慶州)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왕실에서 사용하던 집기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사신들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다. 1786년(정조 10) 재건, 1952년 현재의 자리로 이건되었다. 동경관이란 동경(東京)의 객관(客館)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최석신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객사건물이 8·15광복 이후 모두 헐리고 시가지로 바뀌면서 객관의 서헌(西軒)만을 이건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기와집으로, 원래 팔작지붕이었으나 옮기면서 맞배지붕이 첨가되었다.

 

홍산객사[ 鴻山客舍 ] -부여(扶餘)

1982년 8월 3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었다. 외국사신이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머물던 건물이다. 1836년(헌종 2) 당시의 군수 김용근(金龍根)이 건립했다고 전해지며, ‘객사기(客舍記)’에 따르면 인부 4,000여 명에 목수 20여 명이 동원되어 5개월에 걸쳐 완성했으며 건축비는 일반인의 기부금과 공금(公金)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평삼문으로 된 외삼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동쪽 익실(翼室)과 정면 3칸 측면 2칸의 서쪽 익실이 붙어 있다. 정당은 겹처마 맞배지붕이고 동서 익실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문의 문산관[ 文義 文山館 ] -청주(淸州)

1978년 2월 22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1666년(현종 7)에 세워진 문의현의 객사로 목조기와로 된 고주집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인 본건물의 양쪽에 정면 3칸, 측면 3칸 및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 한쪽 끝을 개조하여 증축한 것으로 중앙건물과 양쪽 건물 사이에 협칸이 있으며, 재료와 수법으로 보아 건축연대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붕의 암막새에 연대가 양각된 명문(금속이나 돌에 새기는 글)으로 보아 1728년(영조 4)에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대청댐 수몰지역으로 1979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청녕헌[ 淸寧軒 ] -충주(忠州)

충주시 성내동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의 동헌으로, 충주 목사가 나라 일을 보던 곳이다. 1870년(고종 7) 8월에 화재로 건물이 불에 타 같은 해 윤 10월에 당시 목사로 있던 조병로(趙秉老)가 금봉산에 있는 창룡사(蒼龍寺)를 헐어서 다시 세웠다. 그 후 내부를 개조해 1983년에 군청이 이전하기 전까지 중원군 청사로 사용했다. 군청 이전 후 충주시에서 완전 해체한 뒤 원형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때 1870년 10월 중건 당시의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건물은 2개의 기단 위에 2단의 사각형으로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지면에서 약간 올려 지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이다.

 

태안 목애당[ 泰安 牧愛堂 ]-태안(泰安)

조선 후기 영조 때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태안의 객사에는 정청 6칸, 동헌 12칸, 서헌 10칸, 중대청 8칸, 하마대 5칸 등의 건물이 있었는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소실되었다. 현재는 목애당·내삼문·경이정(憬夷亭)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건물 등 4동만 남아 있다. 목애당은 소실되고 남은 목재와 태안 소근진성(충남기념물 93)의 목재를 사용하여 1904년(고종 8) 신축한 것이다. 태안면사무소로 사용하다가 1970년 태안읍사무소가 신축, 이전하게 되자 농촌지도소, 민원실 등으로 사용해왔다. 1997년 8월 행정관청으로 사용하면서 내부가 많이 변경된 것을 복원하였다.

 

울산동헌 및 내아[ 蔚山東軒 및 內衙 ]-울산(蔚山)

울산도호부의 관아로 1681년(숙종 7)에 부사 김수오가 창건한 것을 1695년(숙종 21)에 그의 아들 김호가 부사로 부임하여 일학헌(一鶴軒)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1763년(영조 39) 부사 홍익대가 중창하여 반학헌(伴鶴軒)이라 개칭하였다. 그후 한때 군청 회의실로 사용되어 내부 구조가 변형되었지만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익공집이다. 동헌은 조선시대에 지방장관인 고을의 수령이나 감사, 병사, 수사 그밖의 수령들이 공무를 집행하던 건물의 일곽, 즉 대청을 말하며, 내아(內衙) 등의 부속건물이 따르는데, 이것은 지방관청의 안채를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