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근정전[ 景福宮 勤政殿 ] -서울

1395년(태조 4)에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진 건물이며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이 거행되었고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1395년에 지은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재의 것은 조선 말기인 1867년(고종 4) 11월에 흥선대원군이 136년만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다포양식(多包樣式)의 건물로,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정면과 후면, 좌우 측면에 계단 설치되었으며 상, 하 월대에는 하엽동자를 받친 돌난간을 둘렀다. 각 계단과 월대 모서리에는 12지신상을 조각하였고 정면 계단에는 석수를 조각하였고 답도에는 봉황을 새겨넣었다. 다포양식의 전각은  정면 5칸(30m), 측면 5칸(21m)의 중층 팔작지붕의 큰 직사각형 건물이다.

 

경복궁 사정전[ 景福宮 思政殿 ]-서울

1395년 태조 때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건립되었고 '사정(思政)'이라는 편전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다. 이곳은 경복궁의 편전(便殿)으로 임금이 평상시에 머물면서 정사를 펼치던 곳이었다. 정전인 근정전 바로 뒷편에 위치하며 사이에 사정문(思政門)이 있고 사정전 뒤로 향오문(嚮五門)을 통해 강녕전으로 연결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복궁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867년(고종 4)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건립한 것이다. 하지만 태조 때 건립된 형태와는 달리 좌우 천추전과 만춘전이 서로 행랑으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전각으로 건립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경복궁 수정전[ 景福宮 修政殿 ] -서울

세종 때 집현전으로 사용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에 재건하면서 수정전이라고 명명했다. 재건 당시수정전 주변에는 약 200칸의 행각(行閣)과 전각(殿閣)이 들어서 있었는데, 이들을 궐내각사(闕內各司)라고 불렀으며 1910년 이후 모두 헐렸다. 1894~1896년까지 조선의 개혁을 주도하였던 갑오경장(甲午更張) 때에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로 사용되었다. 위치는 경복궁 근정전 서쪽이며 경회루 연못 앞에 있다. 넓은 월대(越臺)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익공식(翼工式) 팔작기와 지붕으로 지붕 마루에는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이 얹혀 있다.

           
 

 

 

 

경복궁 교태전[ 景福宮交泰殿 ] -서울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지 3년 후인 1394년에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에는 교태전이 없었으며 그 이후에 지어졌다.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으로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으로 불렀다. 지천태(地天泰), 전각의 규모는 정면 9칸 측면 5칸이며 장대석 4벌대로 기단을 쌓아 장방형의 큰 규모의 전각으로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우측에는 원길헌(元吉軒)이 위치하고, 좌측에 함홍각(含弘閣), 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부속 건물로 연결되어 있다.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양의문(兩儀門)이라고 이름지었으며 음양의 조화를 의미한다.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0년에 다시 중건한 것이다.

 

.경복궁 자경전[ 景福宮 慈慶殿 ] -서울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1888년(고종 25년)에 중건되었다. 이 곳은 익종(翼宗:追尊王)의 비이며 고종의 양모가 된 신정왕후(神貞王后)가 거처하던 곳이다. 자경전과 여기에 붙어 있는 청연루(淸燕樓)와 협경당(協慶堂), 그리고 자경전 뒷편으로 복안당, 맞은편의 만세문, 행각(行閣)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경전 좌측 담장은 꽃담으로 장식하였고 뒷마당에는 십장생이 새겨진 굴뚝이 유명하다. 자경전은 정면 10칸, 측면 4칸, 단층팔작 기와지붕, 익공(翼工)집. 장대석 댓돌 위에 사다리꼴의 높은 초석을 놓고 모기둥[方柱]을 세워서, 2익공(二翼工)의 공포를 짜고 겹처마를 들인 소박한 건물이다.청연루는 사각형 석주를 세우고 누마루를 깐 팔작집이다.

 

경복궁 강녕전[ 景福宮康寧殿 ] -서울

경복궁의 내전(內殿)이며 왕이 일상을 보내는 거처였으며 침전으로 사용한 전각(殿閣)이다. 1395년(태조 4)에 창건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건물 이름을 강녕전(康寧殿)이라고 지었다. 강녕은 오복(五福)의 하나로, 임금으로서 해야 할 이상적인 정치이념을 궁궐 건축에 반영한 유가(儒家)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강녕전의 동쪽 침전을 연생전(延生殿)이라고 지었고 서쪽 침전을 경성전(慶成殿)이라고 지었다. 강녕전은 임금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기에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웅장한 목조건축물이며 4단의 기단이 설치되고 가운데에는 월대를 설치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한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재건하였다.

           
 

 

 

 

경복궁 태원전[ 景福宮 泰元殿 ] -서울

고종 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지어진 건물이다. 1872년에 조선 건국 480주년을 기념하여 태조의 존호(尊號)를 올리면서 영희전(永禧殿)에 있던 태조 어진(御眞)을 베껴 그리기 위해서 이곳으로 옮겼다가 1개월 뒤에 다시 영희전으로 옮겼다. 1890년(고종 27)에는 익종(翼宗)의 비인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 조씨(趙氏)의 국상(國喪)에 빈전으로 사용되었고, 1895년에는 명성왕후(明成皇后, 1851∼1895) 민씨(閔氏)의 빈전으로도 쓰였다. 그 뒤에 헐렸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다. 주변에는 혼전(魂殿)으로 건립된 문경전(文慶殿)과 회안전(會安殿) 등이 자리하고 있다.

 

경복궁 함원전[ 景福宮 含元殿 ] -서울

왕비의 침전인 경복궁 교태전 서쪽에 위치하며 협문으로 연결된다. 세종 때 불상을 모셔두고 불교의식과 행사를 열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후에는 단종이 머물렀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을 복원하기 위해 이건되었다가 1995년 제자리에 다시 중건되었다. 건축구조는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다. 함원(含元)은 원기(元氣)를 간직한다는 의미이다. 함원전(含元殿)은 정면 6간 측면 4간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방을 두었으며, 대청과 방들을 퇴와 협실로 둘러싸고 있는 이익공(二翼工) 집이다.

 

. 경복궁 흥례문[ 景福宮興禮門 ]-서울

창건된 것은 1395년(조선 태조 4)으로, 원래 이름은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중건하면서 청(淸)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인 홍력(弘歷)에서 홍(弘)자를 피하기 위해 흥례문으로 고쳤다고 한다. 1990년 정부가 경복궁 복원사업을 시작하면서 역사바로잡기 차원의 일환으로 1996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뒤, 2009년까지 마무리되는 경복궁 복원사업의 5개 권역 가운데 침전(寢殿)·동궁(東宮)에 이어 3번째로 2001년 10월 26일 완공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경복궁 경회루[ 景福宮 慶會樓 ]-서울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이다.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창건된 것은 1395년으로, 이때 경회루 주위에 작은 연못이 조성되었고, 1412년(태종 12) 태종의 명에 의하여 큰 방지를 파고 경회루를 창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서 273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방지의 크기는 동서가 128m, 남북이 113m인데, 못 안에 방형의 섬을 만들고 거기에 누를 세웠다. 경회루는 중루(重樓), 팔작지붕의 2익공(二翼工) 집으로, 누마루를 받는 48개의 높직한 돌기둥이 줄지어 서 있다

 

경복궁 향원정[ 景福宮 香遠亭 ]-서울

향원정(香遠亭)은 향원지 가운데 섬 위에 세워진 육각형의 정자로,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이층의 익공식 기와지붕이다. 1867년(고종 4)부터 1873년(고종 10)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경회루(慶會樓)의 서북쪽 넓은 터에 있는 향원지(香遠池) 안의 작은 동산 위에 있다. 정자의 평면은 정육각형으로 아래층과 위층이 똑같은 크기이며,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으로 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일·이층을 관통하는 육모기둥을 세웠다. 공포(栱包)는 이층 기둥 위에 짜여지는데, 기둥 윗몸을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 주두(柱枓 : 대접받침)를 놓고 끝이 둥글게 초각(草刻)된 헛첨차를 놓았다.

 

창덕궁 돈화문[ 昌德宮 敦化門 ]-서울

조선 태종(太宗) 12년인 1412년 5월에 건립하였으며, 창덕궁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다음해 돈화문에 큰 종(鐘)이 설치되어 매일 정오와 오후 10시에 종을 쳐 시각을 알렸다.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선조(宣祖) 재위 40년인 1607년에 복원이 시작되어 광해군(光海君) 원년인 1609년에 완공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돈화문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重層) 우진각지붕집이다. 중앙의 3칸은 가운데 주열(柱列)에 각각 2짝씩 문짝을 달았으나 좌우 맨 끝의 칸과 측면 앞의 절반은 모두 벽을 쳐서 막았다. 위층은 누마루를 깔고, 4면에 작은 판문(板門)을 돌려 달았으며, 고주(高柱)는 좌우 2개만 있고 가운데는 넓은 공간을 이루고 있다.

 

 

 

 

   
 

   
 

창덕궁 인정전[ 昌德宮 仁政殿 ]-서울

태종 이방원이 거처할 이궁(離宮)으로 창덕궁을 건립하면서 1405년에 완공되었다. 태종 때에는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이었으나 1418년에 규모가 큰 건물로 고쳐지었다. 인정전(仁政殿)은 인자한 정치를 펼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창덕궁의 정전(政殿)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재로 전소되었고 선조 때 복구공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 2)에 다시 건립되었다. 이후 인정전은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행하였고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다. 하지만 창덕궁은 여러차례 화재로 시달렸는데 1803년 선정전에서 불이나 인정전까지 전소되고 말았다. 이듬해 1804년(순조 4) 다시 건립되었다.

 

창덕궁 선정전[ 昌德宮 宣政殿 ] -서울

창덕궁의 편전(便殿)이며 조선시대의 국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신하들과 국사를 의논하고 행하던 곳이다. 창덕궁이 건립되던 초기에는 조계청이라고 불렀다가 세조 즉위 7년인 1461년에 선정전(宣政殿)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인정전 동쪽 광범문(廣範門)을 나서면 뒤쪽에 위치한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선정전에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며 조선 중기 역사의 질곡을 함께한 건축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재로 전소되었고 1647년 인조 때 중건되었다. 건물은 둘레에 행각으로 둘러쌓여있고 동쪽은 담장이다. 정면으로는 어로(御路)인 복도가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 대조전[ 昌德宮 大造殿 ]-서울

창덕궁의 내전(內殿)을 겸한 침전(寢殿). 보물 제816호이다. 창덕궁대조전은 창덕궁 창건 때인 1405년(태종 5)에 함께 지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496년(연산군 2)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지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 창덕궁 재건 때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833년(순조 33)에 또다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재건되었다. 1917년에도 불에 타자, 1919년에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交泰殿)을 이건(移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대조전은 수차례에 걸쳐 소실되고 재건되어, 본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