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대[ 鏡浦臺 ]-강릉(江陵)

강원도지방유형문화재 제6호였으나 2019년 12월 30일 보물 제2046호로 승격 지정됐다. 정면 6칸, 측면 5칸, 기둥 32주(柱)의 팔작지붕 겹처마기와집의 누대(樓臺)로, 강릉 오죽헌(烏竹軒)에 있던 율곡(栗谷)이 10세 때에 지었다고 하는 《경포대부(鏡浦臺賦)》를 판각(板刻)하여 걸었다.또한 숙종의 어제시(御製詩)를 비롯하여 여러 명사들의 기문(記文)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특히 누대의 전자액(篆字額)은 유한지(兪漢芝), 정자액(正字額)은 이익회(李翊會), 제일강산(第一江山)은 주지번(朱之蕃)의 글씨라고 하는데, ‘江山’ 두 자를 잃어버려 후세인이 써 넣었다고 한다. 

 

오성정[ 五星亭 ]-강릉(江陵)

1974년 9월 9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었다. 1627년(인조 5)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2000년 현재의 건물은 1927년 정묘생(丁卯生) 동갑계에서 강릉 객사 일부를 옮겨서 건립한 것이다. 정자 이름은 ‘정묘년에 오성관이 취규하여 선정을 폈기 때문에 정통인화하고 천하가 태평하였다’라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원래는 1666(현종 7)에 송광연(宋光淵)이 지평(持平)으로 강릉에 왔을 때 이 정자 아래 조그만 집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올라와서 지냈던 곳이라 전한다. 한말에는 의병이 이곳에 집결하여 왜병과 싸운 곳이다.

 

.방해정[ 放海亭 ]-강릉(江陵)

원래 이 자리는 삼국시대 때의 고찰(古刹)인 인월사(印月寺) 터였다. 방해정은 1859년(철종 10), 운정동 강릉 선교장(江陵船橋莊:중요민속자료 5)의 주인이자 통천군수(通川郡守)였던 이봉구(李鳳九)가 지은 건물이다.이봉구는 예빈시(禮賓寺) 참봉을 거쳐 청안현감과 통천군수를 지냈다. 선교장의 주인으로서 관직에 나간 사람은 이봉구가 처음이었으므로 그 전에는 이씨댁(李氏宅)으로 불렸으나, 이봉구가 통천군수를 지낸 이후부터는 통천댁(通川宅)으로 불렸다.방해정은 관직을 물러난 이봉구가 1859년(철종 10) 선교장의 객사(客舍) 일부를 헐어다가 짓고 만년을 보낸 곳이다

 

 

 

 

   
 

 

 
 

운암정[ 雲巖亭 ] -횡성(橫城)

1984년 6월 2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섬강이 내려다 보이는 횡성교 부근의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규모는 정면 810㎝, 측면 540㎝, 높이는 368㎝이다.1937년 당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김한갑(金漢甲)과 이원식(李元植) 두 사람이 세웠다. 어려서부터 한 동리에서 자란 김한갑과 이원식은 무척 가난하게 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잘 살아 보자고 굳은 결심을 하고 피나는 노력을 하여 마침내 부자가 되었다. 가난을 함께 한 두 사람은 회갑을 맞아 자신들이 계획한 바를 이룬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정자를 세우기로 하고, 두 사람이 반반씩 나누어 내기로 하여 완공하였다.

 

요선정[ 邀仙亭 ]-영월(寧越)

1984년 6월 2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이 지방에 살고 있는 원·곽·이씨 중심으로 주민들이 힘을 모아 숙종·영조·정조가 편액, 하사한 어제시를 봉안하기 위하여 1913년 정자를 짓고 요선정이라 불렀다. 요선정은 조선 중기 풍류가인 봉래 양사언이 이곳 경치에 반해 선녀탕 바위에 ‘요선암(邀仙岩)’이라는 글자를 새긴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전면 오른쪽에는 이응호(李應鎬)가 쓴 ‘요선정’, 왼쪽에는 ‘모성헌(慕聖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밖에 요선정기(邀仙亭記), 중수기(重修記)가 걸려 있다. 정각 건립 당시 주천 청허루에 보관했던 숙종의 어제시(御製詩)를 이곳으로 옮겨 봉안했다.

 

청암정[ 靑巖亭 ] -봉화(奉化)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에 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금닭이 학의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지세라 마을을 ‘닭실’ 또는 ‘유곡(酉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청암정은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정자로, 냇물을 끌어 올려 연못을 파고 조촐한 장대석 돌다리를 놓았다. 물 위에 거북이가 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인 형상이다. 초가가 딸려 있는데, 정내(亭內)에는 ‘靑巖水石(청암수석)’이라 새긴 허목(許穆)이 쓴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 모습 그대로 살려 주춧돌과 기둥 길이로 조정하여 위치에 따라 정자의 높이가 각각 다르다. 정자 한쪽에 마련된 방에는 온돌 구들이 아니고 마루가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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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계정[ 建溪亭 ] -거창(居昌)

정자는 건계정과 장씨 정려 및 비석 등의 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계정은 정면 3칸과 측면 2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의 중층 누각 형태 기와집이다. 누마루는 통칸으로 되어 있으며 배면 중앙에 판벽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공포 양식은 초익공 형식이고 상부 가구는 도리가 다섯 개인 5량 구조다. 자연 암반 위에 건축하여 아래 기둥이 암반의 높낮이를 따라 자연스럽게 설치되어 있다. 정자 안에는 용 문양과 젓대를 불며 비천하는 선인과 호랑이·산수화 등을 그려 두어 신선 세계를 연상케 한다. 정자 안에는 조정희의 ‘건계정기’를 위시하여 후손들과 유림의 기문과 문인 27명의 한시가 걸려 있다.

 

모현정[ 慕賢亭 ]-거창(居昌)

2004년 3월 18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6호로 지정되었다. 1898년(광무 2) 김굉필, 정여창과 함께 학문에 전념하던 최숙향 등 3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평촌공의 후손과 유림들이 정성을 모아 건립하였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누하주(樓下柱)를 세운 누각 형식으로 내부에는 방을 들였다. 평면은 우물마루를 깔고 건물 주위로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5량 가구 형식으로 우물천정으로 시설하였고 처마는 겹처마로 하였다. 전체적인 균형미가 돋보이며, 간결하고 소박한 가구기법을 사용하여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관수정[ 觀水亭 ] -장성(長城)

송병주가 소유하고 관리한다. 송흠의 본관은 신평(新平)이고,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관수정이다. 영광(靈光)에서 태어났으며, 1480년(성종 11) 사마시를 거쳐 1492년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있다가 연산군 때에는 은퇴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516년(중종 11) 홍문관 정자(正字)에 복직하여 박사(博士)·지평(持平) 등의 관직을 두루 지냈다. 1528년에 담양부사, 1531년에 장흥부사를 거쳐 노모 봉양을 위해 전주부윤으로 옮겼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34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다시 노모를 위해 왕의 특허로 집으로 돌아갔다. 1

           
     
 

일원정[ 一源亭 ] -거창(居昌)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전척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78호로 지정되었다. 김동환이 소유하고 있다. 1905년 김숙자(金叔滋)의 후손과 유림(儒林)들이 건립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 7현을 제향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서원 역할도 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3량 구조로 된 팔작지붕집이며,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계자난간을 설치했다. 부속건물인 객사(客舍)는 정면 5칸의 맞배지붕 목조와가이며, 건물 앞 황강 언덕에는 김숙자의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심소정[ 心蘇亭 ] -거창(居昌)

조선 세종 때 북벌의 공을 세우고 단성 현감을 지낸 윤자선(尹孜善)이 1450년 하향하여 은거하던 중 1459년(세조 4)에 건립한 정자이다.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전면에 뒷마루를 두고 좌측 2칸은 대청, 우측 2칸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계자 난간이 있는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정자 규모와 내외부의 공간 구성이 주변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팔작지붕의 목조와가이다. 지금의 건물은 1757년(영조 33) 윤자선의 외손 완산이씨, 밀양박씨가 다시 지은 것이며, 이 정자 주변의 풍광과 산수를 즐기며 후진을 가르쳤다고 한다.

 

사자루[ 泗泚樓 ]-부여(부여)

원래 1824년(순조24)에 세워진 누정으로 임천면(林川面)의 관아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건축물이다. 1919년 부소산성(扶蘇山城)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송월대(送月臺)에 옮겨짓고 누정의 현판을 개산루(皆山樓)에서 사자루로 변경하였다. 2층 문루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2층에는 누각을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 정면에 한말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 쓴 〈泗泚樓(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땅을 고를 때 정지원(鄭智遠)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금동석가여래입상(金銅釋迦如來立像:보물196)이 발견되었다.

           
     
 

한풍루[ 寒風樓 ] -무주(茂朱)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기록에 전주의 한벽당과 남원의 광한루와 더불어 삼한(三寒)의 하나로, 호남의 제1루라고 나와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 무주 누정조에는 성종 때의 성임(成任)과 중종 때의 유순(柳洵)의 시가 실려 있고, ‘한풍루재객관전’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객관, 즉 관아에 딸렸던 건물로 추정된다.  1592년(선조 25)에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현감 임환이 다시 지었고, 그뒤 1783년(정조 7)에 현감 임중원이 중수하였다. 그 후에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의 이명주(李命周)가 소유자가 되었다

 

낙암정[ 洛巖亭 ] -안동(安東)

1987년 12월 29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집이다. 1451년(문종 1)에 배환(裵桓:1379∼?)이 처음 건립하였고 1813년(순조 13)에 중건하였다. 1881년(고종 18)과 1955년에 중수하였다. 낙암정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있어 절벽 아래로 낙동강 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건물구조는 안동지역에 있는 일반적인 정자의 형태와 다를 바 없으나 난간기둥이 윗부분에 비해서 아랫부분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 배환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사복시판사를 지낸 배상지(裵尙志)의 아들이다.

 

영보정[ 永保亭 ] -영암(靈巖)

1987년 1월 15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04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12월 3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054호로 승격하였다. 조선 초기 예문관 직제학을 지낸 최덕지(崔德之)가 은퇴한 뒤, 지금의 영보촌(永保村)에 거주하면서 통례원 좌통례를 지낸 사위 신후경(愼後庚)과 함께 건립하였다. 15세기 중반에 창건되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당시의 규모도 명확하지 않다. 선조 연간 이후 퇴락하였다가, 1630년경 최덕지의 7대손인 기정(棄井) 최정(崔珽)과 신천익(愼天翊)이 전주최씨·거창신씨(居昌愼氏)들과 함께 뜻을 모아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는데, 이때 현재의 규모로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