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권씨 초간종택 별당 [醴泉權氏草澗宗宅別堂]

 

1967년 6월 23일 보물 제457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조 때 대제학을 지낸 권문해(權文海)의 조부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건물을 향해서 오른쪽 3칸은 넓은 대청으로 하고 왼쪽 1칸은 온돌방이며 내부는 다시 2개의 방으로 구분되어 있다. 대청 전면은 문짝 없이 그대로 개방하고 측면과 후면은 인방 이하를 판벽(板壁)으로 하여 중앙에 각각 2짝 10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기둥은 모두 방주(方柱)로 되었고 내부 종량(宗樑) 위에 마루 대공(臺工)의 형태는 하엽형(荷葉形)의 받침 위에 첨차(墅遮)와 초각반(草刻盤)을 얹은 형식이며, 대들보에서는 홍예량(虹霓樑)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추사 김정희선생 고택 [秋史 金正喜先生 古宅]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은 건물 전체를 동서로 길게 배치하여 동쪽에는 사랑채를 앉히고 서쪽에는 안채를 놓았는데 사랑채는 남향이나 안채는 동향인 것이 특징이다. 옛 건물만큼이나 백송도 유명한데, 백송은 고택 오른쪽으로 700m정도 떨어져 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1786~1856)의 옛 집이다. 현재는 옛 건물 외에 대문채와 사당채가 더 있는데 이 둘은 1977년 집을 복원할 때 다시 세운 것이다. 사랑채 앞에는 추사의 글씨로 석년(石年)이란 글씨가 새겨진 돌비석이 있는데 이는 그림자의 길이로 시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 일종의 해시계이다.

 

이천 김좌근 고택 [利川 金左根 古宅]

 

2003년 4월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내촌리 소일마을 상단 뒤편에 나지막한 산을 끼고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조선 후기에 세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김좌근(1797~1869)의 묘지를 관리하는 한편 별장으로도 사용하기 위해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金炳冀)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좌근의 묘는 이 집 뒤쪽에 자리한 안동 김씨 문중 묘역에 있다. 원래는 99칸이나 되는 대규모 전통 한옥이었으나 현재는 솟을대문, 담장, 행랑채가 모두 없어지고 안채와 별채만 남아 있다

           
   

 

 

경주 양동 서백당 [慶州 良洞 書百堂]

 

양동마을 안골의 중심에 위치한 서백당은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규모 가옥이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자리잡았다고 전해지는 양민공 손소(孫昭) 선생이 성종15년(1454)에 지은 집으로, 청송에서 처가가 있는 양좌동에 들어옴으로써 경주손씨(慶州孫氏)가 되었다. 이 집터에 관해서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집터는 설창산의 지맥이 응집된 곳으로 여기서 위인 세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실제로 두 사람의 위인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우선 손소의 둘째 아들 손중돈으로 조선시대 이조판서와 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경주 양동 근암 고택 [慶州 良洞 謹庵 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76호. 勿자형 마을의 안쪽 언덕 위에 국가민속문화재 제75호인 경주 양동마을 상춘헌 고택과 나란히 붙어 있다. 가전(家傳)하는 바로는 1780년(정조 4)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전체 배치는 一자형 문간채가 서남향으로 있고, 그 안쪽에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가 서남향하고 있다. 그리고 一자형 헛간채가 안채 부엌과 나란히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 서북쪽 산언덕 위에는 사당채가 따로 쌓은 담장 속에 자리잡고 있다. 대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중앙에 대문 두 짝을 안여닫이로 달고, 좌측 서쪽에 광 1칸, 우측 동쪽에 문간방 1칸을 두고 있다.

 

경주 양동 두곡 고택 [慶州 良洞 杜谷 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77호. 원래 이언적(李彦迪)의 6대손인 이시중(李遈中)의 분문가(分門家)로 1733년경에 세워진 것이나, 현주인 이희태의 조부가 매입한 것이라고 한다. 勿자형 마을의 남촌 넓은 터에 바로 앞의 산줄기를 향하여 남향한 집으로 一자형 대문간채, 마구간채, ㅁ자형 몸채, 광채 등 모두 5채로서 구성된 큰 집이다. 동남향한 대문간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서남쪽부터 광 1칸, 대문 1칸, 광 2칸을 두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전면에 남향한 사랑채가 있고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광 1칸과 마구간 2칸으로 구성된 마구간채가 있다.

           
 

 

 

 

경주 양동 무첨당 [慶州 良洞 無忝堂]

 

보물 제411호. 이 별당의 평면은 ㄱ자형으로 서쪽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고, 그 옆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서쪽 끝의 온돌방 앞에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구조는 막돌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아름답게 초각된 쇠서 하나를 내어 초익공식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간살은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그 위에 밑면이 초각된 동자기둥을 놓고 중도리 방향으로도 밑면이 초각된 첨차와 소로를 짜넣어 종보와 중도리를 받치고 있다.

 

경주 양동 관가정 [慶州 良洞 觀稼亭]

 

보물 제442호. 성종 때의 문신인 손중돈(孫仲暾)의 고택(古宅)이다. 서향받이 언덕에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으로 자리잡고, 동북쪽에 사당을 배치하고, 담장으로 양쪽 측면과 뒷면을 둘러막아, 주택의 앞쪽을 탁 트이게 하여, 낮은 지대의 경관을 바라보게 하였다. 그러나 1981년의 보수로 전면에도 담장을 쌓고 일각대문을 내어 경치가 많이 가리어졌다. 집의 배치는 중문을 중앙에 두고, 서쪽에 사랑채, 동쪽과 북쪽에 안채를 두었다. 사랑채는 방 2칸, 대청 2칸으로, 대청은 누마루로 되어 있다. 중문 동쪽에는 한 칸의 온돌방, 두 칸의 부엌, 한 칸짜리 방 두 개를 두었다.

 

경주 양동 향단 [慶州 良洞 香壇]

 

보물 제412호. 이 건물은 동방사현(東方四賢)의 한 사람인 이언적(李彦迪)이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건축한 것이다. 이 건물은 야산죽림(野山竹林)을 배경으로 낮은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반 상류주택과 다른 특이한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이는 풍수지리에 의거, 몸채는 月자형으로 하고, 여기에 一자형 행랑채와 간막이를 둠으로써 用자형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랑채·안채·사랑채가 모두 한 몸체로 이루어지며 각각의 마당을 가져 작은 중정(中庭) 두개가 있는 특색 있는 구성을 한다. 행랑채는 정면 9칸, 측면 1칸으로 오른쪽으로부터 방·대문·마루·방·곳간·마구간 등이 들여졌다.

           
     
 

안동 하회 옥연정사  [安東 河回 玉淵精舍]

 

1979년 1월 23일 국가민속문화재 제88호로 지정되었다. 1586년(선조 19) 화천(花川) 건너 부용대(芙蓉臺) 기슭에 세운 건물로 류영하가 소유·관리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류성룡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작은 서당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걱정하던 중 탄홍(誕弘) 스님이 10년 동안 곡식과 포목을 시주하여 완공하였다고 한다. 문간채·바깥채·안채·별당까지 두루 갖추고 있으며, 화천이 마을을 시계 방향으로 휘감아 돌다가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옥소(玉沼)의 남쪽에 있다. 소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서 옥연정사라고 부른다.

 

안동 하회 겸암정사 [安東河回 謙菴精舍]

 

중요민속문화재 제89호. 유성룡(柳成龍)의 맏형인 유운룡(柳雲龍)이 1564년(명종 19)에 지었다고 한다. 위치는 하회마을 북쪽 화천(花川)을 끼고 우뚝 솟은 부용대(芙蓉臺)의 서쪽, 옥연정사(玉淵精舍)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다. 강가 전면에 정사의 몸체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크기로 一자형 평면을 이루면서 자리 잡고 이의 뒤쪽에 살림채가 ㄱ자형 평면을 이루면서 자리 잡고 있다. 몸채는 서쪽에서부터 방 2칸, 대청 4칸을 두고 다시 앞쪽으로 대청 1칸, 뒤쪽으로 방 1칸을 두었으며, 전면과 좌우에 툇마루를 달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안동 하회 하동 고택 [安東河回 河東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177호. 예천 용궁현감을 역임한 유교목(柳敎睦)이 1836년(헌종 2)에 건축하여 대를 이어 살아오다가 1953년유시익(柳時益)이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남촌(南村)의 중심에서 북쪽으로 남촌과 북촌을 가르는 길가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주택은 행랑채·사랑채·안채들이 각기 독립되어 있지만 사랑채와 안채는 튼ㅁ자를 이루어 양반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안채의 중앙에는 안마당 가득히 정면 3칸의 대청을 드려놓았는데, 보간[樑間]은 1칸으로 비교적 폭이 좁다. 오른쪽 칸의 뒤쪽 반 칸에는 아래위 2층으로 된 수장공간(收藏空間)을 설치하여놓았다.

           
     
 

안동 하회 북촌댁 [安東 河回 北村宅]

 

7대에 걸쳐 200여 년간 부와 명예를 누린 북촌댁의 역사는 1797년에 현재의 자리에 류사춘(柳師春)이 집을 짓고 만수당(萬壽堂)이란 이름을 붙이며 시작되었다. 이후 류사춘의 아들 류이좌(柳台佐)가 집을 중수하면서 화경당으로 당호를 바꾸었다. 현재의 북촌댁은 류도성(柳道性)이 화경당의 규모를 크게 키워 증축한 것이다. 류도성이 집을 증축할 당시의 흥미로운 일화가 지금껏 전해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1859년 여름, 상갓집에 조문을 갔다 돌아오던 마을 사람 수십 명이 탄 배가 홍수로 갑자기 불어난 물살 때문에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안동  하회 양진당  [安東 河回 養眞堂]

 

안동 양진당은 16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의 종택이다. 류운룡은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입암 류중영(柳仲郢, 1515~1573)의 장자로서,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진보현감, 사복시첨정, 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류운룡이 입암 류중영의 장자이기 때문에 류중영의 종택이기도 하고, 풍산류씨 대종택이기도 하다. 양진당은 풍산류씨 하회마을 입향조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에 지은 것이다. 안채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그 후에 다시 지었으며, 화재로 손상된 흔적이 안채와 맞닿은 사랑채 부분에 남아 있다.

 

안동 의성김씨 종택 [安東 義城金氏 宗宅]

 

안동 의성김씨 종택은 의성김씨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종가이다. 김진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영중(瑩仲), 호는 청계이다. 할아버지는 진사 김만근(金萬謹)이고, 아버지는 교위 김예범(金禮範)이며, 어머니는 군수 신명창(申命昌)의 딸이다. 김진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뜻이 높아 기묘명유(己卯名儒)들을 찾아 가르침을 배워 견문을 넓히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또한 음사(淫祠)나 귀신은 자신의 몸을 더럽힌다고 여겨 이를 멀리하자 무당이 그가 사는 마을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