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金山寺 ] -김제(金堤)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을 인용하여 사적기(事蹟記)가 만들어졌는데, 금산사의 창건은 599년(백제 법왕 1)에 왕의 자복(自福)사찰로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전하는 바는 진표(眞表)가 762년(신라 경덕왕 21)부터 766년(신라 혜공왕 2)까지 4년에 걸쳐 중건(重建)하였으며, 1069년(문종 23) 혜덕왕사(慧德王師)가 대가람(大伽藍)으로 재청하고, 그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이라는 대사구(大寺區)를 증설하여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도량(大道場)이 되었다.1598년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미륵전·대공전(大恭殿)·광교원(廣敎院) 등과 40여 개소에 달하는 산내 암자가 소실되었다.

 

룡사[ 龜龍寺 ] -원주(原州)

신라의 승려 의상(義湘)이 668년(문무왕 8)에 세운 절로, 창건 당시의 절 이름은 구룡사(九龍寺)이다. 이름에 얽힌 9마리 용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며, 창건 이후 계속하여 도선(道詵) ·자초(自超) ·휴정(休靜) 등이 거쳐 가면서 영서(嶺西) 수찰(首刹)로서의 구실을 다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절 입구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 때문에 절이름도 ‘아홉구’자를 ‘거북구’자로 고쳐 쓰게 되었다고 한다. 현존 당우는 대웅전 ·보광루(普光樓) ·삼성각(三聖閣) ·심검당(尋劍堂) ·설선당(說禪堂) 등이 있는데, 수차례 대웅전을 중수하였음에도 그 안에 있는 닫집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낙산사[ 洛山寺 ] -양양(襄陽)

양양 낙산사는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의상에 의해 창건된 후 여러 차례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른 유서 깊은 사찰이다. 2005년 대규모의 산불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일대를 발굴조사하였다. 그 결과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 건물지와 기왓조각들이 다량 출토되고 오랜 역사를 뒷받침하는 유적이 확인되는 등 유서 깊은 사찰로서 그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었다. 사찰 경내에는 조선 전기의 7층석탑과 원통보전의 담장, 홍예문, 사리탑, 홍련암과 의상대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소실된 동종과 원통보전은 복원중이다. 2008년 12월 18일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었다.

           
   

 
 

내원사[ 內院寺 ]-양산(梁山)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로, 한때 내원암이라 불렀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설화가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 당나라 태화사의 승려들이 장마로 인한 산사태로 매몰될 것을 예견하고 효척판구중(曉擲板求衆)이라고 쓴 현판을 날려보내 그들을 구해준 인연으로 1,000명의 중국 승려가 신라로 와서 원효의 제자가 되었다. 원효가 이들이 머물 곳을 찾던 중 내원사 부근에 이르자 산신이 마중나와 현재의 산신각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에 원효는 대둔사(大芚寺)를 창건하고 상·중· 하 내원암을 비롯하여 89개의 암자를 세웠다.

 

국청사[ 國淸寺 ]-부산(釜山)

.국청사(國淸寺)는 신라 시대 의상(義湘) 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국청사지(國淸寺誌)』에 “국청사에는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 다대포진 첨사 윤흥신(尹興信) 등과 함께 승장 만홍(萬弘), 정안(定安), 성관(性寬), 관찰(寬札) 등 수백 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703년(숙종 29) 금정산성이 개축되면서 국청사와 해월사(海月寺)를 지었다. “청정한 마음으로 국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서며, 외적의 더러운 짓밟힘을 막고 깨끗하게 국토를 수호한다.”는 의미로 국청사라 이름 하였다

.

 

내소사 [ 來蘇寺 ] -부안(扶安)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년)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소래사(蘇來寺)라 하였다. 대소래사·소소래사가 있었으나, 대소래사는 소실되었고 지금의 내소사는 소소래사가 남아 전하는 것이라 한다. 고려 말 최자(崔玆)의 《보한집(補閑集)》에 보이는 정지상(鄭知常)의 시나,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일기(南行日記)》에는 모두 소래사라 하였다. 소래사라는 이름이 내소사로 바뀌게 된 경위는 확실치 않으며, 다만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할 뿐이다.현재의 사찰은 조선 인조(仁祖) 11년(1633) 청민대사(淸民大師)가 창건하고 고종 2년(1865)에 관해선사가 중건한 것이다.

           
 

 

 

 

대전사[ 大典寺 ]-청송(靑松)

672년(신라 문무왕 12) 의상(義湘)이 세웠다는 설과 919년(고려 태조 2) 눌옹(訥翁)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절이 있는 산과 절의 이름은 주왕의 설화에서 유래한다.《주왕내기(周王內記)》에 따르면,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하고 신라로 건너와 주왕산에 숨었다. 이에 당나라가 신라에 주왕을 없애달라고 부탁하자 마일성 장군 오형제를 보내 주왕의 무리를 죽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주왕이 숨었던 산을 주왕산이라 하고, 절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하였다.

 

도갑사[ 道岬寺 ]- 영암(靈巖)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으며, 조선 전기 1456년(세조 2) 수미(守眉)가 중건하였다. 국보 제50호로 지정된 도갑사의 해탈문(解脫門)은 현존하고 있는 한국의 건물 중 보기드문 옛 건축물이며, 이 밖에 대웅보전(大雄寶殿:지방유형문화재 42)·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물 89)·도선국사비(지방유형문화재 38)·명부전(冥府殿)·팔각석등대석(八角石燈臺石)·3층석탑·5층석탑·석제(石製) 구유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도선 및 수미대사의 영정(影幀)이 봉안되어 있다.

 

대원사[ 大圓寺 ] -

대원사는 1923년 창건되었다. 당시 경상북도 안동시 당북동에 법룡사가 있었으나, 법룡사에는 소위 상류층의 신도들이 많아 서민층의 신도들과 융화가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권오규를 비롯한 5명이 공동으로 시주하여 현재의 위치에 별도의 사찰을 건립하였다.6·25전쟁 때 훼손된 법당을 태연과 화주 보살 5~6명이 중창하기 시작하여 1969년 준현대식 법당을 건립하였다. 당시 법당은 본존불을 아미타불로 하였기 때문에 극락전이라 하였다. 종각의 종은 1979년 6월 조성하였다.

.대원사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5호인 「안동 대원사 소장 탱화」가 있다

           
   

 
 

갑사[ 甲寺 ] -공주(公州)

계룡사·계룡갑사·갑사(岬寺)·갑사사(甲士寺)라고도 한다. 420년(백제 구이신왕 1)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하였다. 505년(무령왕 5) 천불전(千佛般)을 중창하고 556년(위덕왕 3) 혜명(惠明)이 천불전·보광명전·대광명전을 중건하였다. 679년(문무왕 19) 의상(義湘)이 당우(堂宇) 1,000여 칸을 더 지어, 화엄도량(華嚴道場)으로 삼아 신라 화엄십찰(十刹)의 하나가 되었고, 옛 이름인 계룡갑사를 갑사로 개칭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모두 소실되어 1654년(효종 5) 사정(思淨)·신휘(愼徽) 등이 크게 중창하였고, 1875년(고종 12) 다시 중건하였다

 

마곡사[ 麻谷寺 ]-공주(公州)

태화산 마곡사(麻谷寺)는 640년(백제 무왕 41)에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1851년에 쓰여진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에는 "초창은 자장이요, 재건은 보조(체징體澄)이며, 3건은 범일(梵日)이요, 4건은 도선(道詵)이며, 5건은 학순이다"라고 한국 불교사상 고명한 승려들의 연관설을 싣고 있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등 신빙성이 약하다. 삼국 말기, 백제와 신라의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에 백제의 핵심부에 신라의 승려인 자장이 창건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동학사[ 東鶴寺 ] -공주(公州)

계룡산 상봉 북동쪽 골짜기에 위치한 이 절은 724년(신라 성덕왕 23) 상원조사(上願祖師)가 조그만 암자를 지어 수도하였으며 그가 입적한 후 724년(신라 성덕왕 23) 상원조사의 제자인 회의(懷義)화상이 쌍탑을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인 920년 도선국사가 사찰을 중창하였고 국사가 원당을 건립하여 국운융창을 기원하였다고 하여 태조의 원당이라고 불리웠다.  937년(고려 태조 20)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承官) 유차달(柳車達)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始祖)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낼 때, 동계사(東鷄祠)를 건축하니 참선승려들이 운집하여 사찰이 커지게 되었고 후에 동학사로 고쳤다고 한다.

           
   

 
 

동화사[ 桐華寺 ]-대구(大邱)

493년(신라 소지왕 15) 극달(極達)이 세운 유가사(瑜伽寺)를 832년(흥덕왕 7)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건(重建)할 때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여 있어 동화사라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그후 여러 차례 중창(重創)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1732년 8번째 중건한 대웅전·극락전을 비롯하여 연경전(蓮經殿)·천태각(天台閣) 등 20여 채의 큰 규모의 건물이 있고, 당간지주(幢竿支柱)·비로암(毘盧庵) 3층석탑·동화사 입구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遮那佛坐像)·금당암(金堂庵) 3층석탑·석조부도군(石造浮屠群) 등 보물 6점이 있다. 이곳에 1992년에는 높이 30m나 되는 석불인 약사대불(藥師大佛)이 조성되었다

 

무량사[ 無量寺 ] -부여(扶餘)

신라시대에 창건하였고, 여러 차례 중수(重修)하였으나 자세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드물게 보는 2층 불전(佛殿)으로 내부는 상 ·하층의 구분이 없는 조선 중기의 건물로서, 당시의 목조 건축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극락전 내에는 거대한 좌불(坐佛)이 안치되었는데 중앙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좌고(坐高)가 16자, 가슴둘레 24자이며 좌우의 관세음(觀世音)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각 좌고가 16자에 가슴둘레가 18자이다. 또한 여기에는 석가불화(釋迦佛畵)가 있는데 길이 45자 8치, 폭이 25자 2치나 되는 조선 인조 때의 불화로 기구(機構)가 장대(壯大)하며 묘법(描法)도 뛰어나고 채색도 선명하다.

 

미황사[ 美黃寺 ] -남해(南海)

남해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489m) 서쪽에, 우리나라 육지의 사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한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세워졌다. 12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미황사는 조선시대 중.후기에 걸쳐 이 같은 융성을 거듭하다 100년전 주지 혼허(渾墟) 스님이 중창을위해 모금차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와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을 당한 뒤에 점차 퇴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퇴락한지 100년이 흐른 후, 현재 미황사에 주석하고 있는 지운스님과 현공스님, 금강스님이 1989년에 주인없이 비어 있던 미황사를 찾아 흔적만 남아 있던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부도암 등을 복원하고 퇴락한 세심당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