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Tiananmen]

 

'천상의 평화의 문'이라는 의미의 천안문(天安門)은 베이징의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네 개의 주 관문 중 하나이며, 광대한 천안문 광장은 이 문에서 이름을 얻었다. 이 광장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880m, 동쪽에서 서쪽으로 500m의 넓이로 뻗어 있어,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시 광장이다. 천안문의 건축은 1417년 명나라의 자금성 건축의 일부로 시작되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략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699년의 개조 작업 때였다. 20세기까지 천안문 앞의 구역에는 정부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이 지역은 1902년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으로 피해를 입어 비워지게 되었다.

 

자금성 태화전 [Hall of Supreme Harmony]

 

자금성은 1406년부터 1420년에 걸쳐 명나라 영락제(1360~1424년)가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지은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거대한 궁전은 10미터 높이의 성벽과 52미터 너비의 해자가 둘러싸고 있다. 성벽 안은 중앙의 남북 축을 따라 전조(前朝, 궁정의 바깥채)와 내정(內廷)으로 나뉘어 있다. 태화전(太和殿)은 금란전(金棄殿)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황제가 관료들을 접견하던 정전(正殿)으로, 전조 안, 중앙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1695년 청나라 강희제(1654~1722년) 때 세운 것이다.

 

악양루 [Yuèyáng Tower]

 

후난성 웨양시의 웨양고성 서문 위에 있는 누각으로 장시성 난창의 등왕각(縢王閣), 후베이 우한의 황학루(黄鹤楼)와 더불어 강남 3대 명루(名楼)의 하나로 불리고 있다. 악양루(岳阳楼)의 전신은 삼국 시기 동오의 명장 노숙이 건립한 군루로 동한 건안 20년(215) 손권과 유비가 형주를 놓고 다툴 때 노숙이 전략적 요충지인 파구에 주둔하면서 둥팅호에서 군사를 훈련시키며 둥팅호 인근에 파구성을 건립하고 수군의 검열을 위한 열군루로 건설한 것이 현재 악양루의 전신이다. 양진과 남북조 시기에 이 열군루는 파릉성루라고 개명되었으며 군사적 중요성으로 장대한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등왕각 [Pavilion of Prince Téng]

 

당(唐)의 고조(高祖) 이연(李渊)의 아들인 등왕 이원영(李元嬰)이 653년에 처음 건립하였으며 장시성 난창시 서남쪽, 장강의 지류인 간강 동안, 둥후구에 위치하고 있다. 최초 건립 후 20여 년 후 후임 홍주도독이 이를 재건하고 문인들로 하여금 시문을 짓게 하였는데 그중 왕발이 지은 등왕각서(滕王閣序)가 유명하다. 이후 송(宋), 원(元), 명(明), 청(清)에 걸쳐 수십 차례의 중건 및 복구를 거쳤으며 이에 따라 건물의 형태가 변화되었다. 현재의 등왕각(縢王閣)은 높이 57.5m의 9층, 내부면적 13,000㎡의 위용으로 1989.10월 복원되어 난창시(南昌市, 남창시)의 상징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

 

황학루 [Yellow Crane Tower]

 

후베이성(湖北省) 우한시 창강가의 서산(일병 黃鶴山)에 있는 누각으로 원화군현도지에는 삼국시대 오(吴) 황무 2년(223) 손권이 군사적 목적으로 성을 쌓고 황학루(黄鹤楼)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황학루와 관련 국사록의 기재 내용에 따르면 신씨(辛氏)가 개설한 주점에 선인이 지나가다가 벽에 한 마리 학(鹤)을 그렸는데, 그 모양이 춤을 추듯 아름답다고 알려지면서 이곳의 장사도 날로 번창하였으며 10년 후 선인이 다시 와 학을 타고 구름위로 날라 가자 신씨가 그걸 보고 황학과 도사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누각을 짓고 이름을 황학루(黄鹤楼)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양고궁 봉황루 [Fenghuanglou]

 

샹펑러우[翔鳳樓]라고도 부르며, 청나라 태종(太宗, 1636~1643) 때 건립되었다. 선양고궁에 있는 청녕궁의 문루로서 당시 성징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헐산식 지붕에 황금색 유리기와를 얹고 테두리는 녹색으로 장식하였다. 건물 주변에 회랑을 두렀으며, 내부에는 조각으로 장식한 들보와 그림을 그린 기둥을 세워 화려하기 그지없다. 선양이 아직 청나라의 수도일 때 태종 홍타이지가 이곳에서 정사를 논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선양고궁의 주체 건물 가운데 하나로서 총 면적 1270.65㎡에 이르는 고대 채색화가 보존되어 있다.

 
             
     

 
 

.남경 열강루 [Nanjing thermal Wejangou]

 

우한의 황허러우[黃鶴樓], 웨양의 웨양러우[嶽陽樓], 난창의 덩왕거[滕王閣]과 더불어 중국 강남지방의 4대 명루(名樓)로 꼽힌다. 스쯔산은 1360년 주원장이 8만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진우량의 40만 명 대군을 격파하여 명나라 설립의 기초를 닦은 곳이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운 뒤 1374년 스쯔산에 이 누각을 세우도록 명하고 스스로 〈열강루기(閱江樓記)〉를 지었으며, 그러나 건국 초기에 국가재정이 빈약하여 실제로 누각을 짓는 공사는 완공되지 못한 채로 남았다. 1999년 2월, 신중국 건국 40주년을 기념하여 난징시에서 개수공사를 시작하여 2001년 9월 18일 완공하였다.

 

요성 광악루 [Liaocheng Guangweou]

 

광악루(光岳樓)는 명나라 태조 때 동창부의 위수가 원나라의 잔존 부대와 싸우면서 토성을 벽돌로 쌓은 전성으로 재건하였고, 1374년 남은 재목으로 100자 높이의 고루를 세운 뒤 위무러우라고 불렀다. 축조 목적은 적의 동태를 살피고 시간을 알리며 경보를 울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지명을 따서 둥창러우라고 불리다가 명나라 홍치제 때 광웨러우로 개칭되었다. 광웨러우는 송나라와 원나라에서 명나라와 청나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대표적 건축물로서 외형면에서는 송·원의 누각을 참조하였으나 구조면에서는 당·송의 건축기법을 그대로 살렸다.

 

성황각 [城隍閣]

 

성황각(城隍閣)은 높이 41.6m의 7층 건물로 오나라 왕 손권(孫權)이 진을 쳤던 곳으로 유명한 우산(吳山) 꼭대기에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의 난간에 오르면 동편으로는 첸탕강의 모습, 북쪽편으로는 항저우의 시가지를 볼 수 있으며, 서쪽으로는 시후호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누각 1층에는 항저우시 공예연구소 직원을 비롯한 1만여 명이 투입되어 2년 동안 3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남송항성풍정도(南宋杭城風情圖)>라는 유명한 입체 조소작품이 있다. 2층에는 소동파, 백거이 등 항저주 역사에서 의미있는 인물 28명의 조각 등 다양한 조각상이 있다.

 
 

 

 

 

 

 

 
 

 

   
 

서안성 [Xi'an 西安城]

 

주나라 무왕(武王)이 세운 호경(鎬京)에서 비롯되며, 그 뒤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단속적이었으나 수도로 번영한 역사적 도시로 그 동안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가장 번영했던 당나라 때에는 동서 9.5km, 남북 8.5km의 규모에 인구 100만이 넘는 계획적인 대성곽 도시를 이루어 멀리 서방에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당나라의 쇠퇴와 그에 따른 병란으로 장안도 파괴되어 쇠퇴하였다. 현재의 성곽은 명나라 때 구축되었다.

 

장안성 [Chang’ancheng]

 

중국 한대(漢代)의 국도(國都). 현재 산시성 서안시 서북 교외에 위치. 전한 · 고조7년(B.C. 200), 진시황제가 창시한 흥락궁을 수리하여 장락궁이라 고치고 그 외곽성을 장안성이라 명명. 도읍을 낙양에서 옮기고 혜제1~5년(B.C. 195~B.C. 190)에 확장했다. 성벽은 동 5940m, 남 6250m, 서 4550m, 북 5950m. 남쪽 성벽은 남두, 북쪽 성벽은 북두의 모양을 따서 두성(斗城)이라고 불렀다는 라고 하는 지형설이 있다. 성내에는 장락궁, 미앙궁을 비롯하여 북궁, 계궁 등이 있고 또한 무제 때에는 건장궁이 새로 조영되었다.

 

 

명나라 황릉 [Ming Tombs]

 

1402년, 주디 황제(연호는 영락제(永樂帝))는 조카 주윤웬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했다. 따라서 주디는 명나라의 세 번째 황제가 되었으며 수도를 난징에서 자신이 다스리던 도시 베이징으로 옮겼다. 1407년 아내인 서 황후가 죽자, 주디는 점쟁이를 시켜 황실에 걸맞은 무덤을 지을 만한 장소를 알아보도록 했다. 선택된 장소는 3면이 옌산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풍수적으로도 좋고, 군사적으로 방어하기에도 좋았다. 1409년에 건축이 시작되었고, 결국 16명의 명나라 황제 중 13명이 이 자리에 묻히게 되는데 마지막 무덤은 1644년의 것이다. 황릉 터의 넓이는 40㎢이다.

 
 

 

 

 

     
   

   
 

졸정원 [Humble Administrator's Garden, 拙政园]

 

명나라 때 만들어진 쑤저우 최대의 정원. 베이징의 이화원(颐和园), 청더의 피서 산장(避暑山庄), 쑤저우의 유원과 함께 중국의 4대 명원으로 꼽힌다. 총면적은 약 4만 m2에 이르며 쑤저우의 정원 중 가장 넓고 화려하다. 물가에는 많은 누각들을 연결하는 회랑이 복잡하면서도 아름답게 연결되어 있다. 부지 안에 누각과 연못, 회랑 등을 정교하게 배치하고 장경, 차경 등의 원리를 도입해 경치를 변화시키는 '일보일경'의 전형적인 강남 지방의 정원 양식을 보여준다. 건물의 벽을 도려내 정원의 풍경을 액자처럼 감상하는 환경 기법도 강남 정원의 특징이다. 화창의 모양도 각기 다르다.

 

유원 [Lingering Garden]

 

유원(留园)은 쑤저우 서북쪽 유원 거리에 위치하는 명대 정원이다. 졸정원, 사자림, 창랑정과 함께 쑤저우 4대 명원으로 꼽힌다. 1961년 중국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525년 명나라 가정(嘉靖) 시기 건립을 시작하였고, 1593년에 완공되었다. 명나라 관리의 개인 정원으로 만들어졌으나, 청나라 관리 유소가 이어받아 한벽장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도광 3년인 1823년 대중에 공개되었다. 광서 2년인 1876년 성강이 정원을 보수하며 유원이라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중일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을 거쳐 심하게 훼손되었다.

 

천단공원 [Temple of Heaven]

 

면적 283만m2에 이르는 광대한 공원으로, 원래 천단은 제천의식, 즉 오곡풍양을 위한 기우제와 풍년제 등을 올리기 위해 1420년 명대의 영락제가 건설한 제단이다. 자금성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천단(天坛), 북쪽에는 지단(地坛), 동쪽에는 일단(日坛), 서쪽에는 월단(月坛)이 있어 각각 하늘, 땅, 해, 달에 제사를 지냈는데 천단은 황실 최대의 제단이었다. ‘유리기와’라 불리는 푸른 지붕은 하늘을 나타내는데, 중앙의 4개의 기둥 용정주(龙井柱)는 사계절을, 주위 12개의 기둥은 12개월을, 바깥쪽의 12개 기둥은 12시간을, 내외 처마 기둥 24개는 24절기를 각각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