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성 [Osaka Castle]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운이 편리한 우에마치 대지에 천하 쟁탈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성을 축성하기로 한다. 이것이 도요토미의 오사카성이다. 1585년에 5층 8단, 검은 옻칠을 한 판자와 금박 기와, 금 장식을 붙인 호화로운 망루형 천수각을 완성했다. 그러나 1615년 에도막부가 도요토미를 쓰러뜨리기 위해 벌인 전쟁 '오사카 여름의 전투'에서 도요토미의 오사카 성은 천수각과 함께 불타버린다. 그후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정권이 교체된 것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도요토미의 오사카 성 영역에 석벽을 다시 쌓아올려 성을 새롭게 구축한다.

 

구마모토 성 [Kumamoto Castle]

 

1601년 가토 기요마사가 무로마치 시대에 세워진 치바성과 구마모토성이 있던 챠우스산 일대에 성을 쌓아 1607년에 구마모토 성을 완공했다. 대천수각과 소천수각을 세우고 각 성곽에는 우토 성루를 비롯하여 3층 천수각에 필적할 5단 성루를 5기나 나란히 세웠다. 가토 씨가 파면된 후에는 호소카와 씨가 들어오고 메이지유신을 맞았다. 1877년 세난 전쟁 때 신 정부군을 물리쳐 성의 견고함은 증명되었지만 혼마루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토 성루를 비롯하여 12기의 성루가 남아 있고, 세쇼류로 불리는 높은 석벽도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후쿠야마성 [Fukuyama Castle]

161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어머니와 연고가 있는 미즈노 가츠나리가 후쿠야마 지방으로 임명되어, 해상과 육로의 요충지인 아시다강(江) 삼각지에 구축한 것이 후쿠야마성이다. 성은 도쿠가와 막부의 시코쿠 지방 경영의 거점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교토의 후시미성과 근처 간나베성 건물을 옮겨 지었고, 후시미성에서 옮겨온 후시미 성루가 남아 있다. 천수각은 5층 6단 지하 1단의 층탑형으로 북쪽 외벽이 방어를 위해 철판으로 덮여있었다고 한다. 메이지 유신 후에도 천수각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이 남아 있었는데 대부분이 1945년의 공습으로 소실되었다.

 
             
   

   
 

쓰루가성 [Aizuwakamatsu Castle]

 

에도시대에 아이즈 지방을 다스리던 다이묘[大名]가 살던 성이다. 1384년에 구로카와성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고 1592년에 쓰루가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성에는 소년들의 죽음에 관한 슬픈 역사가 있다. 19세기 말 일본은 에도막부를 폐지하고 일왕(日王)을 정치의 중심으로 하는 메이지정부가 들어섰다. 이에 전국적으로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이 저항하면서 크고 작은 전쟁들이 일어났는데, 아이즈 지방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메이지정부로부터 아이즈 지방을 지키기 위하여 16 ~ 17세의 소년들이 백호대라는 조직을 만들어 전쟁에 참여하였다.

 

히코네성 [Hikone Castle]

 

히코네성은 도쿠가와 사천왕의 한 사람인 이이 나오마사가 비와호(湖)의 이소야마 땅에 성을 쌓으려고 한데서 성의 역사가 시작된다. 나오마사가 죽어서 축성 계획은 수포로 끝나지만, 그 뜻을 이어 아들인 나오츠쿠가 히코네야마(곤키야마)를 성터로 정하고 1607년 천수각 등 주요 건물을 완성했다. 축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원을 받아 지방 다이묘의 재산과 조력으로 이루어지고, 사와야마성과 오츠성 등 주변의 폐성에서 재료와 석재 등을 조달하여 급속도로 추진했다. 그러나 성 밖 마을까지 포함한 성의 완공은 20년 남짓한 세월이 걸렸다.

 

오다와라성 [Odawara Castle]

 

초기의 오다와라성은 15세기 중엽 무렵 오모리 집안이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1495년 호죠 소운이 입성하여, 고호죠 집안의 거점이 된 오다와라성은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의 침공도 물리친 난공불락의 성이다. 그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습격에 대비해 성벽 아래 마을을 포함한 전주 9km의 성곽과 그 바깥쪽의 방어선으로 세운 큰 외곽이 구축되었다. 그러나 성은 히데요시 군사의 포위를 견디지 못하여 열리게 되었고, 도쿠가와의 혈통을 잇는 다이묘인 오쿠보 다다요, 다다치카가 근세 성곽으로 정비했다. 재의 천수각은 1960년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니시혼간사 [Nishi-Hongan-ji]

 

혼간사(공식 명칭은 조도 신슈 혼간사는 정토진종의 혼간사 종파의 본산으로, 이웃하고 있는 히가시 혼간사와 구분하기 위해 흔히 니시 혼간사라 알려져 있다. 13세기에 신란이 창설한 신불교는 가장 널리 믿는 불교 교파 중 하나이다. 혼간사란 '최초 서원의 사찰'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서원이란 신불교 경전에 나오는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아미타 부처의 서원을 가리킨다. 혼간사는 1272년 교토의 오타니에 딸 카쿠신니에 의해 지어진 신란의 능묘에서 기원했다. 1312년 능묘는 사찰이 되었고, 처음에는 '센주사'라 불렸으나 이후 1321년에 혼간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이다이사 [Saidaiji]

 

종파는 고야산 진언종이며 본존은 천수관세음보살이다. 주고쿠33관음영장의 제1번 예소이다. 751년 후지와라노미나타루히메가 관음상을 안치한 것이 시작으로 777년 안류 스님이 당우를 건립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사이다이지라 칭하였으나 나중에 사이다이지(西大寺)라 개칭하였다. 1299년에 소실된 기록에 의해 본당, 상행당, 삼중탑, 종루, 인왕문, 경장 등을 갖춘 지방 굴지의 큰 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칠당가람이 늘어서 있다. 해마다 2월 세 번째 주에 열리는 에요는 일본의 3대 기제 중 하나로 유명하다.

 

 

산주산겐 당 [Sanjūsangen-dō]

 

산주산겐 당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122m 길이의 렌게오 인(蓮華王院) 사찰 본당은 일본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로, 12세기에 은퇴한 고시라카와 천황의 명에 의해 지어졌다. 산주산겐 당이란 '33개의 칸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라는 의미인데, 건물은 정확히 그 이름대로이다. 산주산겐 당에서 숭배하는 불교의 자비의 신인 관음은 도움을 청하는 이의 상황에 어울리는 서른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현재의 전당은 1249년 화재로 전소한 원래의 전당을 충실하게 재건한 것으로, 1266년 건축되었으며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야쿠시지 [Yakushi-ji]

 

야쿠시지(藥師寺)는 덴무텐노(天武天皇)의 발원(發願)으로 처음에는 몬부조(文武朝) 때에 후지와라쿄(藤原京) 안에 건설되었었다. 그러나 헤이조쿄(平城京)로 천도하게 된 후 718년에 헤이조쿄(平城京)의 우쿄(右京) 로쿠조니보(六条二坊)에 자리를 잡고 이건(移建)하게 되었다. 불사의 배치계획은 후지와라쿄(藤原京)에 있었던 규야쿠시지(舊藥師寺)의 가라요(唐樣) 시치도가란(七堂伽藍) 배치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건물의 외관도 전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구신(舊新)의 양쪽 야쿠시지(藥師寺) 건물터에서 출토된 옛적 와당(瓦當)문양들이 같은 것은 이것을 잘 입증하고 있다.

 

도쇼다이지 [Toshodai-ji]

 

긴데쓰 니시쿄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759년 당나라 고승 감진[鑑眞]이 일본으로 건너와 세운 절이다. 이곳에는 덴표시대[天平時代]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금당이 있고, 당시의 불상들도 볼 수 있다. 남대문을 지나서 바로 보이는 건물이 금당(金堂)인데, 이 건물은 현존하는 최대의 덴표시대 건축물로서 덴표기와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또 금당 위쪽으로 이어지는 강당은 헤이조쿄[平城京(나라의 옛 이름)]의 도초슈덴[東朝集殿(고관접견소)]을 옮겨 지은 것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나라시대의 건축물이다.

 

고후쿠지 [Kofukuji Temple]

 

긴데쓰 나라역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으며, 나라의 노보리오지와 산조도로에 에워싸여 있다. 이 절은 후지와라 가마타리의 부인 가가미노 히메미코가 교토에 세웠다가 아스카를 거쳐 710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창건 당시에는 175개의 건축물이 세워졌으나 잦은 화재로 당시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이곳에는 오층탑·동금당·북엔당·삼층탑·국보관 등을 비롯하여 12개의 일본 국보가 있다. 이 가운데 오층탑은 높이 51m로 일본에서 두 번째로 높으며 고후쿠사의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이 탑은 화재로 5번이나 불탔으며 현재의 건물은 142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츠루가오카 하치만 궁 [Tsurugaoka Hachiman-gū]

 

츠루가오카 하치만 궁은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세운 가마쿠라 쇼군 시대(1185~1333)의 수호 사당이었다. 이 사당은 전사들을 수호하는 신도의 신 하치만과 고대의 황제 오진, 그의 어머니 진구 황후, 그리고 여신 히메가미에게 바쳐졌다. 미나모토 노 요리요시가 미나모토 가문의 수호신인 하치만을 모시기 위해, 교토에 있는 아와시미즈 하치만 궁의 분관 삼아 1063년 유이가하마 해안 근처에 처음으로 사당을 지었다. 사당은 가마쿠라의 초대 쇼군 요리토모에 의해 118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1191년 화재로 인해 붕괴되었으나, 즉시 재건되었다.

 

가스가타이샤 [Kasuga Taisha]

 

768년에 창건된 신사이다. 일본 헤이안[平安]시대 가장 유력한 집안이었던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씨족신을 모신 것에서 유래했다. 후지와라 집안의 융성과 함께 확대되어 헤이안시대 전기에 현재와 같은 규모가 되었다. 화재로 여러차례 소실되고 복구되는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이 신사의 특징은 넓은 경내, 그리고 신사로 올라가는 길 양쪽에 세워진 수백 개의 석등이다. 이 석등들은 모두 신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겨 기부한 것이다. 신사에 다다르면 입구 부근에 1,000여 개의 석등이 더 있으며 모두 2,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고류사 [Koryu-ji]

 

신라에서 건너온 하다노 카와카쓰[秦河勝]가 창건하였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쇼토쿠 태자가 '나는 고귀한 불상을 가지고 있다. 하다노 카와카쓰가 고류사의 전신인 호코사를 창건하며 이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이곳에는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똑같이 생긴 일본 국보 제1호인 미륵보살상이 있는데, 이 불상을 만든 재료가 국내에서 나는 적송임이 밝혀지면서 한반도의 장인이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 이곳에는 '우는상투미륵상'으로 불리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는데, 이는 616년에 신라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며 전해 준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