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 [RobertAlexander Schumann ]

 

작센의 츠비카우 출생. 아버지는 저술도 하는 서적상이었고 어머니는 신앙심과 음악적 감성이 깊은 사람으로 슈만은 아버지의 문학적 취미와 어머니의 섬세한 감수성을 이어받았다. 11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였으나 16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음악가가 되려는 희망을 버리고 1828년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에서 당시의 명교사 F.비크를 알게 되어 그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또한 슈베르트의 영향이 많이 풍기는 가곡과 피아노곡 등의 작곡도 시작하였다. 1829년 하이델베르크대학의 티보 교수에게 이끌려 잠시 그곳으로 옮겼으나 이듬해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그는 다시 비크에게 피아노를, 극장 지휘자인 도른에게 음악이론을 배우고, 독학으로 작곡 연구도 하였다. 또 1831년경부터는 참신한 필치로 음악평론도 쓰기 시작하여 쇼팽 등의 새로운 음악가를 소개하였다. 1832년 오른손 넷째 손가락을 다치자 피아니스트가 될 꿈을 단념하고, 이때부터 작곡과 평론만을 지향하여 《나비》(작품 2, 1832)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에 의한 연습곡》(작품 3, 1832) 등의 피아노곡을 작곡하였으며, 34년에는 《사육제 Carnaval》(작품 9, 1835)와 《교향연습곡》(작품 13, 1834) 등을 내놓았다.

비발디 [Antonio Vivaldi]

 

베네치아 출생. 어려서부터 산마르코대성당의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과 작곡의 기초를 배웠다. 1693년 수도사가 되고, 10년 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703∼1740년에는 베네치아 구빈원 부속 여자음악학교에 바이올린 교사로 근무하며 합주장·합창장을 역임하였는데, 그 동안 학생들을 위하여 작품을 많이 만들어 학교 관현악단에서 발표하는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하였다.또 한때는 만토바의 필립공의 악장으로 있었으며, 1716∼1722년에는 마르첼로와 알비노니의 영향을 받아 오페라 작곡에도 주력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로마·피렌체·빈 등지를 연주여행하였으며, 또 국외에서도 여러 차례 연주회를 가졌다. 그는 40여 곡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많은 종교적 성악곡, 가곡 등을 남겼는데 기악곡은 음악사에서 특히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협주곡 분야에서도 코렐리 등이 만든 형식을 발전시켜 갖가지 현악기와 관악기를 위한 독주협주곡과 합주협주곡을 작곡,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것은 대부분 알레그로―아다지오―알레그로의 세 악장형식이며, 알레그로악장에서는 으뜸조―딸림조―관계조―으뜸조라는 전형적인 조구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이 다음 세대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으며, J.S.바흐는 비발디의 작품을 여러 곡 편곡하여 그 기법을 익혔다.

   

 

 

 

푸치니 [Giacomo Puccini]

 

이탈리아 가극에 많은 공헌을 남긴 푸치니는, 근대 이탈리아가 낳은 대음악가이며, 베르디 이후의 이탈리아 가극에 근대의 숨결을 불어 넣은 제1인자이다. 1858년 12월 22일 이탈리아의 루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르간 주자였으나 일찍 타계하여, 푸치니는 가난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베르디의 「아이다」가 가까운 도시인 피사에서 흥행된다는 말을 듣고 걸어서 피사에 갔다고 하며, 그것이 푸치니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음은 사실이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탈리아 여왕의 하사금을 얻어 1880년 밀라노 음악원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라 보엠」은 토스카니니에 의해 1896년에 상연되었는데, 오늘날에는 구노의 「파우스트」와 함께 가장 뛰어난 가극이 되고 있다. 이어 「토스카」(1900년) · 「나비 부인」(1904년)이 작곡 · 상연되자 푸치니의 이름은 확고한 존재가 되었으며, 이탈리아의 가극계 뿐만 아니라 세계 가극계의 중진이 되었다. 1924년 11월 29일 브뤼셀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 「사랑하는 아버지(O mio babbino caro)」(<잔니 스키키>), 「그대의 찬 손(Che gelida manina)」(<라 보엠>), 「누구도 잠들면 안 된다(Nessun dorma)」(<투란도트>) 등은 연주회 레퍼토리로 가장 사랑 받는 곡이다.

로시니 [Gioacchino Rossini]

 

낭만파 가극의 큰 깃발을 재빨리 이탈리아에서 내건 로시니는, 밝고 기지에 찬 음악에다 아름다운 가락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오늘날에도 크나큰 감흥을 남기고 있다. 로시니는 1792년 2월 29일 이탈리아의 피사로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도시 도살장의 감독관이자 또 지방극장의 트럼펫 주자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굉장히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 10세 때 양친을 도와서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프리넷티에게 하프시코드를, 안젤로 테세이에게 창법과 화성을 배웠다. 15세 때는 볼냐로에 있는 리세오 음악원의 마티 대위법 교실에 들어가 별도로 첼로를 배웠다. 그리고 조그만 가극이지만 「데메트리오」라는 곡을 작곡했으며, 그리고 이듬 해에는 칸타타로 상패를 받았다. 18세 때의 작품인 1막의 희가극 「라캄비알레 디 마트리모니오(약혼 어음)」는 베네치아에서 상연되어 로시니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이어서 「탄크레디」와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이 상연됨에 따라 로시니의 이름은 이탈리아 전국에 퍼지고, 그 가극은 대단한 속도로 보급되어 갔다. 로시니의 최대 걸작인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1816년 2월20일에 로마에서 상연, 같은 해의 12월 4일에는 「오텔로」가 나폴리에서 상연되었다.

   

 

 

 

.모리스 라벨 [Joseph Maurice Ravel]

 

바스크 지방의 시부르 출생. 생후 3개월 때 파리로 이주, 14세 때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 ·대위법(對位法) ·작곡 등을 공부하였다. 고전적인 형식의 틀을 활용하는 것과 새로운 피아니즘의 개척이라는 두 가지 요인(要因)은 그가 일생 동안 지녀온 경향으로, 이 경향은 최초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재학 중의 작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1899)과 《물의 장난》(1901)에 잘 나타난다. 작곡계의 등용문인 로마대상에 1901년에 응모하여 2위로 입상하였으나, 그 후로는 그의 작풍(作風)에 반감을 품은 심사위원회로부터 응모조차 거부당했으며, 이것이 스캔들로 발전, 파리음악원장 사직으로까지 확대되어, 결국 1위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와 《거울》(1905) 등에서 대담한 화성과 음색의 표현법을 확립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이국을 동경하고 환상을 좋아하는 그의 취미는 《셰라자드》(1898), 《박물지(博物誌)》(1906), 《마다가스카르섬의 노래》(1925∼1926) 등의 가곡과, 오페라 《스페인의 한때》(1909), 《어린이와 주문(呪文)》(1920∼1925), 그리고 《스페인광시곡》(1907)과 《볼레로》(1928) 등의 관현악곡과 결부되었다. 그는 흔히 드뷔시와 함께 인상주의 작곡가로 분류된다.

생상스 [Charles Camille Saint-Saëns]

 

1835년 10월 9일 파리에서 태어났는데, 생상스 일가는 노르망디 출신으로, 루앙 부근의 작은 도시가 고향이다. 아버지와는 일찍 사별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몹시 음악을 좋아했는데, 그것을 통찰했던 어머니와 큰할머니가 두 살 무렵부터 피아노의 기초를 가르쳤다고 한다. 5세 때 피아노 소곡과 노래를 작곡했으며, 베토벤의 소나타를 연주했다. 7세 때 스타마티의 문하에 들어가 피아노를 배웠으며, 피에르 마르당에게 화성을 배웠다. 13세인 1848년, 음악원의 오르간과에 입학하여 작곡을 알레비에게 배웠고, 16세 때 작곡한 「성 세실에의 찬가」로 로마 대상을 획득하는 데 실패는 했지만, 이 현상곡은 성 세실리아 협회로부터 상을 받고 12월 26일에 초연되었다. 같은 해에 성 마리아 교회당의 오르간 주자로 취임하였다. 생상스가 리스트를 만난 것은 1852년이었다. 1861년에는 니델마이어 학원의 피아노 교수로 취임했는데, 이 교수 기간에 포레 · 지구 · 메사쥐 등의 영재를 키웠음은 커다란 발자취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걸작 가극 「삼손과 데릴라」는 그가 33세이던 1868년에 기고했으며, 이윽고 그것은 리스트의 지휘로 바이마르에서 상연되었다. 1868년에는 레종 드뇌르 훈장을 받았고, 1892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은 명예 음악박사 칭호를 생상스에게 주었다.

   

 

 

 

엘가 [Edward Elgar]

 

1857년 6월 2일에 잉글랜드의 브로드히드에서 태어나, 오르간 주자인 아버지로부터 기초 교육을 받았고, 일찍부터 아버지의 조수로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후에는 거의 독학으로 작곡 · 지휘 연주법 등을 배웠고, 12세 때 최초의 작품인 「청년의 지휘봉」을 썼다. 1877년에 폴리차노에서 바이올린을 배웠고 아마튜어 지휘자를 하기도 했으나, 1885년 아버지의 사후에 성 조지 교회당 오르간 주자를 계승하여 조용하고 깨끗한 생활 속에서 음악에의 정진을 계속했다. 1889년, 캐롤린 앨리스 로버츠와 결혼하여 런던에 정주했다. 1890년 우스터에서 거행된 3대 합창단에 의한 음악제에서 자작 「프로와사르」 서곡을 연주했고,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품은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서 각지의 음악제에서 종종 상연되었다. 영국을 위해 만든 갖가지 명곡과, 다년간의 음악을 통한 공적으로 서어(sir) 작위를 받았고, 만년에는 국왕의 두터운 은혜와 온갖 찬사와 갖가지 명예 속에 파묻혀 지냈으며, 1934년 2월 23일 고향 브로드히드에서 사망했다. 그 작풍은 청아하며 기품에 차 있고, 특히 행진곡 「당당한 위풍」은 영국의 공식 모임에서 반드시 연주하는 것이 관례로 되고 있으며, 대영제국을 상징하는 곡이 되고 있다.

스메타나 [Bedřich Smetana]

 

애국의 열정을 지닌 보헤미아의 음악가로, 1824년 3월 2일 체코에서 태어나, 5세 때 4중주곡의 연주에 가담했고, 6세 때 피아니스트로서 대중 앞에 나타났다. 일찍부터 작곡을 모차르트에게, 피아노를 리스트에게 배우려 결심하여 아버지의 뜻을 어기면서 프라하로 갔다. 거기서 카테리나라는 소녀와 소년 2중주단을 만들어 생활하면서, 이윽고 이 소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소녀의 권유로 요제프 프로크시에게 사사했고, 프로크시는 이 소년의 재능을 인정하여 무보수로 가르쳤다. 결국 레오폴트 탄 백작가의 전속 악장으로 취임, 겨우 운이 트이는 계기를 잡았다.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스메타나는 혁명의 물결에 휘말렸고, 그 결과 요주의(要注意) 인물로 지목을 받았다. 그래서 스웨덴으로 달아나 그곳 괴텐부르크 하르모니스카 사라카헤트의 지휘자로 취임해 여기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북국의 바람은 차가와 카테리나의 생명을 앗아갔다. 1859년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에게 이긴 결과, 체코 국민의 예술 의욕은 또다시 싹텄고 스메타나도 1861년 고국에 돌아갔다. 그러나 만년은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프라하의 정신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1884년 5월 12일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