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 [Franz Peter Schubert]

 

리히텐탈(빈)출생. 초기 독일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가곡의 왕’으로 불리고 있다. 아버지는 빈 교외의 리히텐탈에서 초등학교를 경영하고, 어머니는 장인(匠人)의 딸이었다. 그의 음악적 천분은 일찍부터 두드러져 8세 때 교회의 합창지도자들로부터 가창·바이올린·피아노·오르간 등의 기초적인 지도를 받고 11세 때 아름다운 소년 소프라노 음성을 인정받아 빈 궁정예배당의 합창아동으로 채용되어 국립 기숙신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 궁정 오르간 주자 루치카, 궁정악장 A.살리에리에게 작곡법을 배워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16세 때 1년 과정의 교원양성학교에 다닌 후 아버지가 경영하는 학교의 저학년 수업을 담임하기도 하였다. 1814년 《실을 잣는 그레트헨》(작품 2 ·D. 118)을 비롯하여 많은 가곡과 3곡의 현악4중주곡 등을 작곡하였다. 1815년에는 《들장미》(작품 3-3·D. 257), 《마왕 》(작품 1·D. 328)을 비롯한 약 145곡의 가곡과 2곡의 교향곡, 그리고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그의 작품은 극히 일부 친구들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지니는 매력에 끌려 친구가 된 사람도 많았다. 1816년 초등학교 교사직에 압박감을 느낀 그는 빈자리가 생긴 라이바하의 교원양성학교에 음악교사로 취직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로라우 출생.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파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만년에는 미사곡과 천지창조 등 오라토리오풍의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오스트리아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수레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5세 때 친척인 초등학교 교장이자 교회음악가인 프랑크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740년 빈의 성스테파노대성당의 소년합창대에 들어간 그는 당시의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았으나 1749년 변성기에 들어가자 합창대를 나와 그때부터 빈에서 자유롭기는 하였지만 불안정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생활이 1759년까지 10년간이나 계속되고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는 한편, 어느 시기에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인 N.포르포라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하고 음악 애호가인 귀족 툰백작부인의 하프시코드 교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오스트리아의 귀족 퓌른베르크남작 집안의 실내음악가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한다. 또 스테파노대성당 등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가수로서 예배주악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밤에는 세레나데악단에 참여하여 빈거리로 나와 돈을 버는 일도 하였다.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클래식 애호가들의 방에 가보면 음반들이 바흐를 기준으로 정리되어 있다. 보통 알파벳 순으로 정리하기 마련인데, 바흐보다 먼저 정리해야 할 음반들도 보통은 그의 뒤에 둔다. 바흐는 음반정리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바흐에 대한 찬사 중에 베토벤의 말이 인상적이다. 바흐의 이름이 '시냇물'이라는 뜻에 빗대어 베토벤은 “그는 시냇물이 아니라 크고 광활한 바다라고 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베토벤은 바흐를 ‘화성(和聲)의 아버지’라고 대선배로 모셨다. 바흐는 서양음악의 출발점처럼 보이지만, 이전에도 우리에겐 캐논으로 유명한 바흐 시대의 스타 텔레만, 파헬벨이나 헨델이 있었고, 중세시대, 르네상스 시대의 빛나는 음악가들이 있었다. 바흐는 이들 사이에서 이름 그대로 시냇물처럼 조용히 흘렀다. 서양음악의 바로크 시대는 1750년 바흐의 죽음으로 마감될 정도로 바흐는 서양음악사의 절대적인 존재이다. 이 절대성은 서양음악과 기독교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평생 교회를 벗어나지 않고 신탁을 받은 사제처럼 음악에 몰두했다. 그래서 "그의 소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의 명성에 오른 것"이라고 바흐의 전기를 쓴 슈바이처 박사는 말했다.

 

헨델 [Georg Friedrich Händel]

 

독일 할레에서 출생했다. 9세 때부터 오르간 연주자인 F.차하우에게 사사하여 작곡의 기초와 오르간을 공부하였다. 그후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한때 할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18세 때 함부르크의 오페라극장에 일자리를 얻어 이때부터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20세 때 오페라 《알미라 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오페라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가 로마에서 A.코렐리, A.스카를라티의 영향하에 실내악을 작곡하는 한편 피렌체·베네치아에서 오페라 작곡가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1710년 하노버궁정의 악장으로 초빙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방문한 런던에 매료되어 1712년 이후는 런던을 중심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작곡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171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오페라 《충직한 양치기》《테세오》를 작곡, 상연하고 1718∼1720년에는 찬도스 공작의 후원 아래 종교음악의 명작 《찬도스 앤섬》 11곡을 작곡하였다. 또 1719년에는 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상연을 위해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다른 두 이탈리아인 작곡가 G.B.보논치니, A.아리오스티와 함께 그 지배인이 되었다. 그후 약 10년 동안 창작력의 전성기에 들어선 그는 오늘날까지도 상연되고 있는 이탈리아오페라의 명작 《라다미스》《오토네》《줄리어스 시저 》《타메를라노》《로델린다》등을 작곡하였다.

   

 

 
 

.멘델스존 [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비극적인 생애를 보낸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에 비해, 멘델스존의 생애는 그 이름인 펠릭스(행운아)에 걸맞게 참으로 행복한 생애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혜택 받은 결혼, 물질적으로 풍족한 생활, 좋은 벗과의 교우 등은 정녕 행운아 그 자체의 생애였다. 멘델스존은, 우아한 용모와 세련된 사교성의 일면에는 항상 봄바람이 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왕후들은 다투어 그를 초대했고, 연주회는 도처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바로 맑게 개인 푸른 하늘의 태양이었다. 그의 작품은, 바흐 · 헨델 · 베토벤의 감화를 강하게 받았으면서도 전혀 그의 진가를 손상하지는 않았다. 9세 때 처음으로 연주회에 나가 만당의 갈채를 받은 멘델스존은, 예쁜 누이와 함께 피아노를 배웠고, 그리스어와 회화를 배우는 등 교양을 충분히 쌓았다. 멘델스존의 작품은 아름다운 가락과 밝은 음색이 넘치고, 시적 내용도 뛰어났다. 특히 1826년 17세 때에 만든 「한 여름 밤의 꿈」 같은 것은 그의 진가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그는 1809년 2월 3일에 함부르크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47년 11월 4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라이프찌히에서 타계했다. 멘델스존 만큼 행복한 악성은 없었지만, 거기서 공제하기라도 하듯 그 수명은 너무 짧았다.

브람스 [Johannes Brahms]

 

함부르크 출생. 5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우고, 7세 때 O.코셀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10세 때 음악회에 나가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자, 부모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재능을 이용하여 치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코셀은 이를 반대하고 브람스가 그의 스승인 E.마르크센에게 사사하게 하였다. 여기서 그는 작곡법, 고전음악의 가치, 음악의 견실한 구성법과 이론을 배웠는데, 이는 그의 음악적 생애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1850년까지는 브람스의 고난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가정 사정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가계를 돕기 위해 술집 ·식당 ·사교장 등을 돌면서 피아노 연주를 하였으며 여가가 나면 피아노 개인지도, 합창단의 지휘, 합창곡의 편곡 등으로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850년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J.요아힘을 알게 되어 1853년 그와 함께 연주여행을 떠나 이 여행에서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슈만부처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브람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각 방면에 소개하여 음악계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854년 신경쇠약으로 인한 슈만의 자살미수와 입원, 그리고 1856년의 사망에 이르는 약 2년 동안에 브람스는 작곡에 몰두하는 한편, 어려움에 처해 있는 슈만가(家)를 도왔다.

     
 
 

베르디 [Giuseppe, Verdi]

 

베르디의 음악은 조건 없이 대중 속에 받아 들여지는 매력을 갖고 있고, 가극을 구성하는 극적인 효과가 두드러지게 뛰어나다. 비제의 「카르멘」이 그렇듯이, 베르디 가극의 음악도 거리 한 모퉁이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베르디는 1813년 10월 10일 이탈리아의 레론코레라는 한 촌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로 충분한 교육도 받지 못했으나, 일찍부터 음악적인 재능에 혜택을 입어 8세 때 마을의 오르간 교사에게 오르간을 배웠고, 1년도 채 못 되는 동안에 완전히 졸업하여 교사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 후 부유한 바레찌 집에 임시로 몸을 의지하고 지내면서 재능을 키웠고, 20세 때에는 필하모닉 협회의 지휘자 겸 오르간 주자로서 출세를 한 뒤에 고향에 돌아왔다. 23세 때 은인 바레찌의 딸과 결혼했고, 2년 후 밀라노에 돌아가 첫 가극 「오베르토」를 발표, 메레리에게 인정을 받아 스칼라 극장에서 상연하면서 베르디의 음악은 시작되었다. 그는 가극 외에도 취주악 행진곡 · 교향곡 · 피아노 협주곡 · 피아노 변주곡 · 세레나데 · 가곡 등을 수없이 만들었는데, 무엇보다도 가극에서는 바그너와 함께 당대 최고의 명성과 영예를 짊어지고 있다. 1901년 1월 27일 밀라노에서 타계했다.

차이콥스키 [Pyotr Ilich Tchaikovsky]

 

우랄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 출생.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립(帝立)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관리가 되었다가, 1860년 안톤 루빈시테인이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 이 교실이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으로 개편되면서 제1기생이 되었다. 그 뒤 모스크바음악원이 설립되자 교관이 되었으나(1866∼78), 77년 이전부터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폰 메크 부인(1831∼94)으로부터 연금을 받아왔기 때문에 곧 교직을 떠나 창작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얼마 후 교향곡 제4, 5, 6의 3곡을 완성하고 93년 10월에는 제6교향곡을 완성 초연하였는데, 그날로부터 며칠 후인 11월 콜레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음악은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엽에 걸쳐 성립된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으로 볼 수 있으나 낭만파의 수법을 초월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러시아악파의 특징으로 되어 있는 변박자와 민요의 사용도 극히 상식적인 것이었고, 비조리성과 논리의 비약이 없어 서유럽에서는 높이 평가되지 못하고 속류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그의 작품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보면 약 40년간에 걸친 창작활동 중에는 시민세대의 음악의 기점과 종말이 있었고,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악파의 중요한 일익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