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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독일 본 출생. 할아버지 루트비히와 아버지 요한도 음악가였으며 악재(樂才)를 인정한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적 소질을 과시하려고 4세 때부터 과중한 연습을 시켰으며, 7세 때에는 피아노 연주회까지 열었다. 베토벤은 몇몇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1779년에 그를 가르친 크리스찬 고트로프 네페로부터는 음악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인 영향까지 받았다. 1782년 궁정예배당 오르간 연주자로 출발, 2년 만에 정식 멤버로 임명되고 1787년에는 빈에 가서 흠모하던 모차르트를 만났으나, 어머니의 위독으로 곧 본으로 돌아와 이 해에 끝내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떠맡았다. 그러다가 1792년 바르트슈타인백작을 비롯한 친구들의 원조로 빈에 유학, 결국 그곳이 그의 영주(永住)의 땅이 되었다. 빈에 자리 잡은 베토벤은 귀족들의 보호를 받았으며, 셴크·알브레히트베르거·하이든·살리에리 등에게 사사하여 음악가로서의 지식과 능력을 키워 나갔다. 1795년 피아노 연주자로서 데뷔하고 이 시기에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하여 착실한 첫발을 내디뎠다. 1796년 프라하·드레스덴·베를린을 여행하고, 1800년에는 《제1교향곡》과 6곡의 현악4중주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귓병이 나서 점차 악화하였다.

모차르트 [Wolfgang Amandeus Mozart]

 

모차르트는 빈에서 지낸 그의 생의 마지막 시기에 최고의 곡들을 작곡했다. 이제 그는 봉건적 예술가가 아니라 시민 예술가로 변모했다. 일단 자유의 맛을 본 이상 남의 하인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러려면 자기 스스로 돈을 마련해야 한다. 연주회 표를 팔든지, 자신이 작곡한 작품의 인세를 확실하게 챙겨야 한다. 그러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모차르트는 아직 그런 시대에 살지 못했다. 세 사람의 예술가를 비교하면 이해하기 쉽다. 모차르트의 선배 하이든은 그야말로 하인으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761년부터 아이젠슈타트에서 에스테라지(Esterházy) 공을 위해 음악 활동을 했다. 1790년에 가서야 그런 예속에서 벗어나 빈에 와서 활동했고, 또 두 번에 걸친 런던 방문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 이전에는 비록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궁정 귀족들에게 음악으로 봉사하는 지위였다. 반면 모차르트의 후배 베토벤은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려 노력해야지, 자신이 귀족들 취향에 맞추어 작곡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려 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음악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드높은 가치를 세계에 선언했다. 그런 만큼 자신은 완벽하게 독립적인 예술가라는 의식을 강하게 지녔다.

     
 

 

파가니니 [Nicoló Paganini]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음악의 기초를 배웠으며, 9세 때 공개 무대에서 자작의 캄파넬라 변주곡을 연주했다. 13세 때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지방을 연주 여행했으며, 파르마에서 롤라에게 사사했는데, 쉽게 스승을 능가하는 실력이어서 그 후에는 혼자 이탈리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명성을 높였다. 1828년 이후 빈 · 베를린 · 런던 · 파리 등지를 여행하며, 그 천재다운 솜씨로 유럽 일대를 놀라게 했다. 그는 많은 재산을 활 하나로써 거두어 들였으며, 한편 베를리오즈가 빈궁하다는 것을 알자 많은 액수의 돈을 보내어 연주회의 적자를 메우게 하는 등 자비의 소유자이기도 했는데, 1840년 5월 27일에 니스에서 타계했다. 소나타 21개 · 카프리치오 24개 · 4중주곡 3개 · 협주곡 2개 등 많은 명곡이 남아 있는데, 특히 그 중의 카푸리치오는 가장 애주되고 있는 명곡이다. 그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프랑스 혁명의 여파를 받아 감옥생활을 했을 때 파가니니는 사랑하는 바이올린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으며 있었는데, 줄이 습기로 썩어서 한 줄만 남게 되었다. 간수에게 부탁했으나 줄은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시간이 지나자 유연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상히 여긴 간수가 가서 보니 파가니니는 한 줄로 연주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드뷔시 [Achille Claude Debussy]

 

파리 근교 출생. 어려서 양친을 따라 파리로 나와 1871년 칸에 사는 고모의 주선으로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시인 베를렌의 숙모 모테 부인에게 정식 레슨을 받았으며, 그 덕택으로 1872년 가을 파리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1884년 칸타타 《방탕한 아들》로 로마대상을 받았으며, 졸업할 때까지 솔페즈 부문에서 1등상, 피아노 부문에서 2등상, 피아노 반주과에서 1등상 등을 받았으나, 화성법에서는 관습적인 규범에 반발한 이유로 아무 상도 타지 못하였다. 한편, 학비를 벌기 위해 여름방학 동안 폰메크 부인의 피아노 반주자로 3년간 러시아와 유럽 각지를 여행, 감수성과 취미를 기르고 바니에 부부와 알게 되어 교양을 쌓았으며, 바니에 부인을 영감을 주는 여성으로 받들어 《만돌린》(베를렌의 시)과 그 밖의 가곡을 작곡하였다. 로마 대상의 로마 의무 체류기간 2년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다. 로마 유학시절의 작품에는 《봄》과 《선택받은 소녀》(프랑스어로 번역된 로제티의 시에 의함) 등이 있는데, 실제로는 거의 파리에서 작곡된 《선택받은 소녀》는 1893년에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겨울에는 《현악 4중주곡》, 이듬해 겨울에는 출세작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등 걸작품을 계속해서 발표하였다.

   

 

 

 

라흐마니노프 [Sergei Vasil’evich Rakhmaninov]

 

러시아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로 피아노곡에 걸작이 많다.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부터 피아노를 익혔고, 1882년(9세)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 1888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 외에 타네예프(Sergey Ivanovich Taneyev, 1856~1915), 아렌스키(Anton Stepanovich Arensky, 1861~1906)에게 작곡법을 배웠다. 1892년(19세) 졸업연도에 썼던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 c샵단조」는, 후에 런던에서 소개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9년 런던 필하모니 협회의 초대를 받아 작곡가·지휘자·피아니스트로서 인정받게 되었고, 피아노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받았다.그러나 1897년(24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초연된 「교향곡 제1번」(1895)은 평판이 좋지 않아, 이후 신경 쇠약이 심해져 한때는 창작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1901년(28세) 암시 요법에 의해 겨우 회복될 수 있었던 라흐마니노프는 명작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완성하여 글린카(러시아) 상을 받았다. 1906년 드레스덴으로 옮겨 작곡에 전념, 「교향곡 제2번」, 「피아노 소나타 제1번」, 교향시 「죽음의 섬 Ostrov myortvikh」을 완성했다. 1908년에 귀국, 이듬해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는 한편 「피아노 협주곡 제3번」(1909)을 뉴욕에서 초연했다.

쇼팽 [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년 3월 1일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세례를 받은 날은 2월 22일로 기록되어 있어 실제 출생일은 7일이 앞선다. 아버지는 바르샤바 육군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친 프랑스인 니콜라스 쇼팽이고 어머니는 폴란드의 명문 귀족 출신인 유스티나 크지노프스카이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1816년 정식으로 보이치에흐 지브니에게 피아노를 사사했는데, 1818년 공개 연주회에서 기로베츠의 협주곡을 연주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스승 지브니는 쇼팽에게 더이상 가르칠게 없다면서 스스로 그만두었다. 1822년부터는 바르샤바음악원 창설자인 J.엘스너에게 화성법과 대위법을 배우고, 중학 재학 중에 러시아 황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 칭송을 들었다. 또 시골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며 폴란드의 민속음악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1826년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소나타와 변주곡 등을 작곡하고, 또 이 무렵 J.N.후멜과 사귀게 됨으로써 창작하는 데 있어서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30년 11월 쇼팽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었는데, 이때 폴란드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그후 그는 후멜, 탈베르크, K.체르니 같은 피아니스트와 교류를 가졌고, 1831년 9월 빈을 떠나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하여, 러시아군에 의해 폴란드혁명이 진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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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자크 [Antonín Dvořák]

 

드보르자크는 프라하 근교 넬라호제베스(Nelahozeves)에서 9월 8일 태어났다. 바그너(독일)의 「리엔치」가 초연되어 승리를 얻은 해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여인숙 겸 정육점을 경영했으며, 안토닌은 그 장남으로 4명의 동생과 3명의 누이 동생이 있었다. 집안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아버지는 그에게 가업을 잇게 할 계획으로 13세 때부터 리만(Antonín Liemann)에게 독일어를 배우게 했다. 그런데 리만은 또 유능한 음악가이기도 해서 안토닌도 어느 사이엔가 어학 외에 악기와 음악 이론을 배우고 작곡을 시도하게 되었으며, 음악가로서 입신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말았다 1857년(16세)에 다행히 친척의 경제적 원조도 있어서 프라하에 나가 오르간 학교에서 엄격한 기초 교육을 받게 되었다. 1859년(18세) 졸업, 얼마 동안은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한 어려운 생활이 계속되지만, 작곡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아 주로 베토벤(독일)을 연구하면서 실내악과 교향곡의 습작에 힘쓰고 있었다. 그 무렵 선배 스메타나(체코)는 민족 음악 운동을 개시, 1862년에는 국민극장의 오페라극장 관현악단이 발족됐다. 드보르자크(체코슬로바키아)는 이 관현악단에서 비올라 주자로 활동했는데, 스메타나(체코)의 민족 오페라를 연주한 체험은 그의 창작 의욕을 크게 북돋웠다.

리스트 [Franz Liszt]

 

리스트프란츠 리스트의 이름은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단지 피아노 음악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리스트는 ‘교향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해 관현악 분야에 혁명을 일으킨 혁신주의자였습니다. 리스트는 19세기 중반의 독일 관현악이 지극히 상투적이고 진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교향곡’이라는 옛 형식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교향시’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교향시라는 말은 ‘교향곡’과 ‘시’의 합성어로, 교향시란 결국 ‘시적인 교향곡’인 셈입니다. 리스트는 교향시를 통해 ‘시적인 것’, 혹은 ‘문학적인 이야기’를 오케스트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오케스트라로 문학적인 내용을 표현하거나 암시하기 위해선 더욱 다채로운 음향이 요구됩니다. 그 때문인지 리스트의 교향시들을 들어보면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삶처럼 드라마틱한 표현과 화려한 음향으로 가득합니다. 그의 관현악곡에선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교향곡에서는 그다지 자주 들을 수 없는 심벌즈나 종, 트라이앵글 등 타악기의 음향효과가 깊은 인상을 주곤 합니다. 또 트롬본과 튜바 등 저음 금관악기를 동원한 힘차고 어두운 음색은 리스트 특유의 악마적인 관현악 음향을 만들어내서 듣는 이들에게 압도하기도 합니다.